불자로서 최상의 발원은 ‘성불’

불보살님 전 성불 ‘총원’ 올리고

나와 가족의 안녕과 소원 빌며

신심 다지는 발원이 수행원동력

절을 올린다는 것은 그분을 믿고 따르며 의지하겠다는 표현이다. 귀의하며 믿고 따르겠다는 다짐을 발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배에는 발원의지가 담겨 있다. 그런데 대중이 함께 예불하는 경우가 아니고, 홀로 법당에서 절을 올린 다음 별도의 발원을 염송하거나 소원을 말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물론 절을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발원을 하는 분도 많지만 얼른 하고 법당을 나온다. 절을 한 다음 발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교의 예배 형식은 굉장히 체계적이다. 법당에 들어가 상단의 성현을 향해 목례하고 향을 살아 올리고 뒤로 물러나 불보살님을 찬탄하고 오체투지를 한다. 이어 몸과 말과 뜻으로 알게 모르게 지은 잘못을 참회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따라 기뻐하며 부처님께서 오래도록 이 세상에 머물러 진리를 설해 주실 것을 청하고, 소원을 말하며 이뤄주실 것을 기도한다.

현재 아침저녁 대웅전에 올리는 예배의식인 7정례를 한 다음에 하는 소원은 “유원 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이다. “오로지 발원합니다. 다함이 없는 삼보님이시여, 대자대비를 베푸시어 머리 숙여 절하는 인사를 받아주시고 그윽하게 가피의 힘을 끼쳐서 나와 남이 일심에 불도를 이루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예배를 올리고 나서 삼보님께 나의 절을 받아달라고 간청하고, 삼보의 가피력에 힘입어 나 뿐 아니라 일체 중생들이 한 날 한 시에 불도를 이루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떻게 하고자 하거나 되기를 다짐하는 것을 원(願)이라고 하고, 원을 내는 것을 발원이라 한다. 불교는 발원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원이 많다. 모든 불보살님들의 공통적인 원을 총원(總願)이라고 하고, 각자의 독창적인 특수한 원을 별원(別願)이라고 한다. 총원의 대표적인 것으로 사홍서원이 있다. 중생을 다 건지겠다, 번뇌를 다 끊겠다, 법문을 다 배우겠다, 불도를 다 이루겠다고 하는 사홍서원은 현재 법회를 마치며 하는 발원으로 한국불교에는 정착되었다. 이렇게 보면 예배를 마치고 하는 발원은 총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불 뒤의 발원은, 중생을 다 건지겠다고 하는 데서 시작해 위없는 불도를 모두 이루겠다는 네 가지 사홍서원을 다시 하나의 원으로 압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총원은 현대 용어로 말하면 거대 담론에 해당된다. 일상의 소박한 개인적 삶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자칫하면 개인의 삶이 외면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불교도라면 누구나 구경의 원으로 ‘성불(成佛)’이어야 함은 더 말할 나위는 없다.

수행해서 성불하겠다는 이상을 안고 절을 올리는 것이 최상이며, 성불을 단박에 이룰 수 있다는 돈오 법문이 시설되었다고는 하지만 근기가 높지 못한 이들에게 총원은 너무나 멀리 있는 원으로 들리기 쉽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깊은 고통과 절망에 빠졌을 때, 소원이 이뤄지기를 바라며 부처님을 찾아가 공양을 올리고 예배하며 소원을 비는 발원이 결코 적지 않다. 종교는 고상한 철학적 담론보다 소박한 인간의 소망을 비는 기도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고 깨달음의 종교이다. 하지만 부처님을 믿고 따르며 소원이 이뤄지기를 빌며(信), 조금씩 나와 세상을 깨달아(解) 실천하며(行) 궁극에는 깨달음을 스스로 증득하는(證) 일체의 신앙행위에서, 불교는 온전히 실현된다. 그러므로 법당에 들어가 불보살님이나 신중님 등 성현께 절을 올리고 나서 불도를 이루겠다는 총원의 발원과 함께, 나와 가족의 안녕과 소원을 불전에 빌며 신심을 다지는 발원이야말로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원동력이 된다.

[불교신문3095호/2015년4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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