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정법사 기후스님

교민들과 20여년 동고동락

10년 전 위암수술 받으며

부처님 진리 좀 더 실체화

 

‘인간적인 향기 나는 수행자’

3년 만에 귀국 전시회

 

 

“물질이나 명예에

치중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 자체를

비현실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반성해야 합니다” 

기후스님을 만나면 동심이 느껴질 정도로 맑고 편안해진다. 어릴 적 병환은 두 번째 치고 위암 수술까지 받은 분이 맞나 싶을 정도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편 지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교민은 물론 호주인들에게 불법(佛法)의 향기를 전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기후스님(호주 정법사 회주)이 그 주인공이다. 3년 만에 귀국해 서울과 부산에서 ‘수안스님 작품 초대전’을 개최하며 교민불자들을 위한 복지원 기금 마련에 노심초사하고 있는다. 지난 3월14일 부산 서면 소민아트갤러리에서 만났다.  

미국이나 유럽도 아니고, 호주에서 전법(傳法)을 하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아는 거사가 있어 시드니 관광을 간 것이 인연이 됐다”고 스님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때가 1991년 11월. 난생 처음 호주를 방문한 스님이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려 하자 교민 불자들이 “스님도 이곳에 살지 않고 떠나려고 하십니까. 대승(大乘)의 부처님 가르침을 외면하고, 고국으로 돌아가신다니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하소연 했다. 가슴이 뜨끔했다. 시드니의 한국사찰 스님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돌아간 사례가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이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 살고자 하는 교민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호주에 장기간 머물려면 체류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비자를 받아 호주에 입국한 것은 1993년 부처님오신날 직전이었다. 당시 사찰 이름은 불광사였고, 일요법회에 나오는 신도는 7명에 불과했다. 기후스님이 주지로 온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달마사 신도들이 불광사와 합치자는 의견이 나왔다. 주택을 빌려 월세를 내는 두 사찰의 형편과 한국불교가 화합해 노력하면 포교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에 불광사와 달마사는 통합했다. 그렇게 탄생한 절이 정법사(正法寺)다. 이후 정법사는 주변 건물을 매입하고, 기도와 신행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한국불교의 정수(精髓)를 교민 사회와 호주 현지인들에게 전파했다. 지금은 신도들도 늘어 매주 일요일 법회에 100여 명이 참석하고 있다.

절 이름을 왜 정법사(正法寺)라고 했을까? “호주에 머물기로 결심하면서 수행과 전법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지요. 시드니에서 어떤 내용과 어떤 자세로 포교를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올바른 부처님의 법’을 뿌리 내리겠다고 발원을 했습니다.” 그렇게 정법사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전 종정 월하스님은 호주 포교 원력을 듣고 ‘통도사 호주포교원 정법사’와 ‘고려민속문화원(高麗民俗文化院)’이란 친필을 써 주었다.

기후스님은 호주 교민뿐 아니라 해외 각지의 교포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해외에 사는 분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타국에서 심적으로, 물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분들이 부처님 법을 만난 인연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육체적인 피로도 풀었으면 합니다.”

1993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정법사 마당에 봉축연등을 걸었다. 며칠 후 구청에서 “1주일 안에 여기서 떠나라”는 편지를 보내 왔다. 이유는 “주택가에서 종교행사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야외에 불을 켜려면 사전에 구청에 신고하고, 소방차를 대기시켜야 하는 규정을 몰랐던 것이다. 원만한 신행활동을 위해 다른 공간을 알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렵게 집을 구해도 불상(佛像)을 보고는 ‘사이비 종교’로 여겨 계약이 무산되기도 했다. 20여 년 전만 해도 호주에서 불교에 대한 인식, 특히 한국불교에 대해서는 무지(無知)에 가까웠다. 몇 차례 어려움을 겪고 나니,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신도들에게 ‘우리도 집을 하나 사자’고 제안했다. “더 이상 쫓겨나는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신도들에게 원력을 밝혔지만, 시드니에서 사찰로 활용할 정도의 주택을 구입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고심 끝에 스님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태백산에 토굴과 땅이 조금 있으니, 그것을 팔아오겠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5000만원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스님의 솔선수범에 신도들도 마음을 냈다. 각자 보시금을 내고, 길에서 모금활동을 하는 등 혼연일체가 됐다. 그렇게 5000만원을 보탰다. 나머지 1억원은 융자를 내서 2억원짜리 주택(495㎡)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호주 정법사는 제2의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 후 스님과 신도들이 합심하여 인근 주택을 잇달아 매입해 지금은 3300㎡(1000평)의 도량에 5채의 전각이 들어선 ‘여법한 사찰’로 변신했다.

3년 만에 귀국해 전시회를 여는 까닭도 궁금했다. 정법사 뒤에 호주인이 사는 집이 있었는데, 그 주인이 수차례 민원을 제기한 것이 발단이 됐다. 사찰에서 기도와 법회를 하면 목탁도 쳐야하고, 염불도 해야 하는데, “소리를 내지 않고 하라”고 요구했다. 그렇다고 사찰을 옮기는 것도 마땅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그 집이 매물로 나왔고 매입을 결정했다.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았지만, 은행대출이 불가피했다. 신도들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마침 군종특별교구장 정우스님(서울 구룡사 회주)과 구미 남화사 주지 성화스님이 각각 1억 원을 보내오고 통도사에서는 2만 달러를 지원해 주었다. 신도들의 보시금까지 합쳐 지금까지 4억 원을 갚았다. 그래도 13억 원이 남았지만 “정법사 살림을 아끼고 아껴 1년에 1억 원 정도는 갚을 수 있다. 앞으로 상환 기간을 13년 정도로 계획하고 있는데, 되도록 그 전에 갚겠다”는 생각이다.

군종특별교구장 정우스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법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기후스님은 정말 ‘인간적인 향기’가 나는 수행자”라면서 “공심(公心)을 담은 원력이 원만하게 실현되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고 용기를 북돋웠다. 이번 전시회는 호주인에게 구입한 주택의 매입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기후스님은 이 건물을 교민불자들을 위한 복지원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정법사는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비롯해 어린이 법당과 문화원, 교육원, 요사채, 고바우 전통찻집 등의 전각을 구비하고 있다.

교학과 참선 수행은 물론 7년간 묵언 정진을 한 기후스님이 고국에 그대로 머물렀으면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정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문(愚問)에 기후스님은 “지금은 전혀 그런 마음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2005년 위암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사를 오가는 투병 생활을 겪으며 “고통 속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에는 교리적으로, 관념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면, 병마와 마주하면서 부처님 진리가 실체화 되는 것을 느꼈다. 병이 났을 때는 원망도 하고, 수행자로서 부끄럽기도 했다. 제대로 수행했으면 ‘고약한 병’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스님은 병석에 있으면서 삶을 돌아보았다고 한다.

“내가 막상 당하고 나니, ‘내 단속을 제대로 못하고 미약했구나’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정신적인 세계가 좀 더 튼튼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고통을 준 대상이나 내용에 대해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었지요. 그런 까닭에 호주에서의 생활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하하.”

스님은 부처님 제자로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전했다. “출가자들이 각자 수행을 관념적으로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면서 “실제 수행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언행일치(言行一致)는 하고 있는지, 관념과 실제가 하나가 되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안에 비불교적 요소가 없는지 점검하고 진정성 있는 수행을 해야 한다”면서 “세계불교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국불교 세계화의 현주소는 어디인지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고 경책했다. “수행이 힘이 되고, 모든 것의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물질이나 명예에 치중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 자체를 비현실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반성해야 합니다.”

한국불자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한국사회는 정신세계가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자들은 조금 더 불자답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법문도 많이 듣고, 불교 공부도 많이 하고, 수행도 열심히 하면서 냉정하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내면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해 살고 있는지 절실하게 자기반성을 하면서 인간적으로나 불자로서 살아가는 방안을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 기후스님은 …

 

1943년 안동에서 태어나 1964년 범어사 금강암에서 3년 간 행자생활을 했다. 통도사에서 1년간 행자생활을 더하고 1969년 통도사 보광전에서 성공(性空)스님을 은사로 수계했다. 법명은 기후(基厚). 월하(月下)스님으로부터 만오(滿悟)라는 법호를 받았다. 1971년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통도사와 해인사에서 강사를 지냈다. 인천 용화사, 봉암사, 수도암 등 제방 선원에서 참선 수행했으며 특히 1984년부터 1989년까지 경주 기림사 중암에서 묵언 수행도 했다. 저서로 <네가 던진 돌은 네가 꺼내라> <꿈속의 인연들>이 있다.

[불교신문3093호/2015년4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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