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선사와 불교정화⑰ 동화사, 그리고 이어지는 토굴 수행

1961년 종단 대표로

세계불교도대회 참가

 

조실 권위 놓고 학인 돼

지관스님 율장강의 수강

 

1962년 동화사 조실

물러난 뒤

다시 토굴로 가

예전처럼 변함없이

수행지도로 제자들 감화

1961년 종단 대표로 제6회 세계불교도대회에 참가한 금오스님(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청담스님(오른쪽 끝)과 이기영 박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나란히 함께 앉아 있다.

금오스님의 동화사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60년 4ㆍ19 직전에 들어가 1962년 하안거 무렵 나왔다. 화엄사에서는 당신이 직접 제자들과 더불어 선찰(禪刹) 전통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면 동화사에서는 사찰 운영에서 한 발 떨어진 조실로 주로 수행을 점검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시내 포교당 보현사에 머물며 동화사를 왕래하는 식이어서 화엄사 시절과는 많이 달랐다. 세수도 60대 후반에 달해 기력도 예전만 못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화엄사 시절이 절정기였다고 평한다.

동화사는 정화 후 1958년부터 효봉스님과 상좌들이 금당(金堂)에 주석하며 정진했었다. 설석우스님 입적 후 1956년 조계종 종정에 추대된 효봉스님은 양주 흥국사에 머물다 건강 회복을 위해 1958년부터 동화사 금당에 머물렀다. 건강을 회복한 뒤 1960년 통영 미래사로 옮긴 뒤 금오스님과 권속들이 동화사로 온 것이다. 4ㆍ19 이후 다시 쳐들어온 대처승을 석대오 거사의 도움으로 평정한 스님들은 동화사에서 정진했다.

금오스님이 동화사 조실로 주석할 때 총무원장을 역임한 지관스님이 강주로서 학인을 지도했는데 금오스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가 전해온다. 지관스님은 동화사에서 율장을 강의했다. 율사로도 명성이 자자한 금오스님도 특별학인 신분으로 강의를 들었다. 호랑이처럼 무섭고 엄격했던 선사였지만 배움 앞에서는 모든 권위와 선입견 차별을 내려놓고 학인신분으로 돌아갈 정도로 막힘없고 경계에 걸림 없는 선사였다.

1960년 겨울, 종단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사찰에서 물러갔던 대처승들이 다시 밀고 들어와 혼란스럽던 차에 사법부마저 1955년 비구 중심으로 바뀐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 절차가 잘못되었다며 대처승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게 된다. 극한으로 내몰린 비구승들은 1960년 11월 조계사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청담스님이 이끈 순교단 속에는 금오스님의 상좌 월탄스님이 있었다. 월탄스님은 해인강원에서 공부하던 중 종단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조계사에 들어가 울분을 못 이겨 순교를 자원했다. 그리고 대법원 주심대법관 사무실에 5명의 비구와 함께 할복으로 순교를 감행한다. ‘6비구순교사건’이다. 순교 소식을 듣고 조계사에서 달려온 비구 비구니 재가자들이 대법원으로 밀고 들어가고 서울 전경찰이 동원돼 진압한, 4ㆍ19와 더불어 1960년 가장 큰 사회 문제로 비화된 사건이었다.

순교를 감행한 월탄스님 등 6비구는 몇 개월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이듬해 풀려난다. 풀려난 월탄스님은 곧바로 은사가 계신 동화사 내원암으로 갔다. 월탄스님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찾아가니 은사 스님께서는 ‘죽은 보살 중놈이 다시 살아왔다’며 크게 기뻐했다. 큰스님께서는 ‘이 늙은 중이 해야 할 일을 네가 대신했구나, 이제 네 모든 업장이 소멸되었을 것이다’며 감옥살이는 견딜만 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월탄스님은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처처안락궁(處處安樂宮)이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스님께서 내려주신 ‘이뭐꼬’ 화두를 벗 삼아 오히려 밖에 있을 때보다 독방감옥이라 고요하여 참선하기가 좋았습니다”고 답했다. ‘허허 타고난 중놈이구나’ 하며 기뻐한 금오스님은 장삼 자락에서 돈을 꺼내 돈을 주었다. 할복에다 진압과정에서 맞은 상처가 낫지 않은 제자의 건강을 위해 치료비 조로 용돈을 준 것이다. 월탄스님은 제자에게 돈을 주던 은사가 눈물을 보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동화사에 머물던 1961년 11월 스님은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6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귀국 길에는 싱가포르와 대만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들러 불교계 현황을 두루 살폈다. 6차 대회에는 청담스님, 이기영 박사 등과 함께 했다.  

참 스승의 모습 

1962년 여름 금오스님은 결제를 며칠 앞두고 동화사를 떠난다. 금오스님을 이어 전강(田剛)스님이 동화사 조실로 추대됐다. 금오스님과 전강스님은 여러 모로 닮았다. 금오스님은 1896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으며 전강스님은 그보다 2년 뒤인 1898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속성(俗姓) 마저 똑같이 정(鄭)씨다. 두 스님 모두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참방하며 정진했는데, 당대의 고승 한암 용성 혜월선사 회상에서 정진하고 마지막으로 덕숭산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 다른 점은 금오스님은 보월스님 입적 후 만공스님으로부터 보월스님의 제자임을 인정받았고, 전강스님은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사실이다. 그 뒤 1930년대 두 스님은 선원의 조실로 제방의 납자들을 지도했으며 정화 후 화엄사 주지를 번갈아 맡았다. 동화사 조실 역시 금오스님을 이어 전강스님이 맡는 등 걸어온 발자취가 아주 비슷했다. 두 선사 모두 근현대 한국불교 선종사에 큰 자취를 남긴 선지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따르는 제자 권속이 다른 두 스님이 앞뒤로 조실을 맡는 것은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다른 문도 어른을, 그것도 스승이 있는데 다른 스님을 모시는 일은 지금은 꿈에서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시는 달랐다. 법을 갖춘 선지식을 모시는데 문중 스승 어른을 따지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것이 원래 불교전통이었다. 법을 갖춘 스님이 있으면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스승으로 모셨다. 법을 찾는데 스승 제자, 법랍, 문중 격식 같은 것은 모두 허상일 뿐이다. 모든 차별과 분별을 뛰어넘어 오직 법으로 대하고 교류했던 선문(禪門)이었다.

그런데 선가의 전통이 어느 순간 세속에 젖어 문도와 본사라는 거대한 벽을 쌓았다. 그 결과 수행을 바탕으로 한 선가 본래 전통인 법(法)이 물러나고 세속의 법과 인정(人情)이 차지했다. 총림 방장마저 법력은 모자라더라도 해당 문중 어른을 모시는 것이 당연한 법도로 자리 잡았다. 이제 아무리 뛰어난 선지식이라도 소속 문중이 아니면 방장이나 조실에 오르기 어렵게 됐다. 해인총림 초대 방장 성철스님도 해인사 출신이 아니지만 오직 법(法)과 수행 하나만 보고 여러 스님들이 간청해서 모셔왔다. 이제 그 일은 꿈속의 추억으로 남았다.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법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금오스님은 “내가 여기(동화사)에 살러 온 것이 아니네” 하며 동화사를 떠났다. 물론 인정(人情)에서 보면 도리가 아니고 섭섭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사를 건 정진과 철벽에 막혀 오도가도 못 하는 제자를 한방에 수억 겁의 어둠에서 건져내오는 법력만이 스승과 제자를 구분 짓던 ‘법의 시대’ ‘선의 시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금오스님이 정화를 통해서 진정으로 원한 종단과 문화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선법(禪法)은 희미해져가고 덩달아 정화의 본질도 흐려져 갔다.

적상산 태백산 거쳐 서울로…

동화사를 나온 금오스님은 몇몇 상좌를 데리고 전북 무주의 한 토굴로 옮겼다. 당시 금오스님을 모시고 갔던 월서스님(원로의원)은 “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험한 길을 걸어서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의왕 청계사에 스님의 상좌가 주지로 있었지만 금오스님은 토굴로 갔다. 그 이유에 대해 월서스님은 “큰스님께서 토굴 정진을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스님의 토굴 정진은 한동안 계속된다.

무주 토굴을 나온 스님은 태백산 각화사 동암으로 옮긴다. 그곳에는 제자 월초 월성 월남이 정진 중이었다. 스님은 ‘자급자족해야한다’며 밤낮으로 산을 개간했다. 400~500평의 밭을 지어 메밀을 심었다. 월성스님은 동암에서 은사와 인연을 이렇게 회고했다. “한번은 장작할 나무를 베러 산에 갔는데 그야말로 큰스님은 사사건건 간섭했다. 주장자로 “여기를 베라, 저기를 베라” 귀찮을 정도였다. 다른 사찰로 옮길 무렵이었는데 그날도 금오스님은 나무를 하러 가자고 했다. 월성스님이 “이제 여기를 떠날 건데 왜 나무를 합니까” 하고 반문하니 금오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네 놈이 여기 왔을 때 장작이 있었나? 네 놈이 그랬듯이 다른 수좌가 또 올 건데 미리 장작을 해놓아야 할 것이 아니냐? 이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네가 할 일이다.” 금오스님은 동암에서 3년을 주석했다.

이제 일흔을 앞둔 스님의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더 이상 깊은 산중 토굴에서 정진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 한국불교를 선법(禪法)이 살아있는 종단으로 만들고자 했던 선사는 기력이 쇠잔해졌다. 아직, 제자들 공부는 덜 되고 종단도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데 육체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참선 잘하려고 정화했는데 종단 실정이 선사의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스님의 발길은 서울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종단을 향해 노선사의 사자후가 울려 퍼진다. 

법주사ㆍ금오선수행연구원 이사장 월서스님·불교신문 공동기획

[불교신문3093호/2015년4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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