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가득 찬 보물찾기(下) 경북 경남 편

지난호에 이어 지난 3월 초 보물로 지정된 성보들을 소개한다. 이 봄을 느끼며 우리 지역 문화유산을 찾아 순례를 떠나보자. 

영천은해사염불왕생첩경도. (般若龍船,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중생을 건네주는 반야바라밀의 배)

 

도난 이후 30여 년 동안

행방 알 수 없다가

기나긴 추적 끝에

사찰 품으로 돌아온 성보

 

300년 전 조성됐는데

제작 당시 모습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불화

 

경주 남산 석탑 가운데

규모 가장 크고 화려한

창림사지 삼층석탑도

보물로 

불교의 이상향인 극락은 어떤 세계일까. 경전에 따르면 ‘금, 은, 유리, 산호, 호박, 자거, 마노 등으로 땅이 이루어졌고…지옥 아귀 축생 등의 괴로운 경계도 없으며, 봄 여름 가을 겨울 등의 사시사철 없이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 온화하고 상쾌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 극락정토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불화(佛畵) 한 점이 있다. 문화재청이 최근 보물로 지정한 영천 은해사 염불왕생첩경도이다. 경전 기록을 토대로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극락세계에 도착하는 사람들과 아미타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며 연꽃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의 모습 등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얼굴과 팔은 사람인데 다리는 날짐승 모양을 한, 극락에만 산다는 극락조(極樂鳥)도 그림을 배경으로 훨훨 날아다닌다. 중간쯤에는 아미타부처님이 왕생자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도 보인다. 비단 5폭이 들어간 높이 3m가 넘는 불화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배어있을 것이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극락의 장엄한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고 있다”며 “조선전기와 후기의 극락왕생 불화를 연결하는 중요한 사례로 불교회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경주창림사지삼층석탑팔부신중상.

불화에 나타난 극적인 장면만큼이나 그동안 성보가 걸어온 길 또한 파란만장하다. 30여 년 전 은해사 심검당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가 한동안 행방이 묘연하다, 사찰과 스님들의 기나긴 추적 끝에 4년 여 전 다시 사찰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성보의 모습은 예전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전체적으로 색이 바래 어두워졌고 그림의 제작년도와 작가, 소장처 등을 기록한 화기(畵記)부분은 인위적으로 훼손돼 있었다. 이때부터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노력이 이뤄졌다. 보수는 물론이고 정확한 조성시기를 파악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등 가치를 부각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다행히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90년에 펴낸 <전국사찰불화조사>에 ‘건륭(乾隆)15년’이라는 연대가 남아있던 것을 확인해 1750년에 조성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같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불화의 가치는 한층 더 높아지게 된다. 현존하는 20여 점의 조선후기 극락왕생 불화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성보였던 것이다.

보존처리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염불왕생첩경도는 현재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 보관돼 있다. 은해사 성보박물관 관계자는 “성보를 돈으로 보고 훔쳐가는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문화재 지정작업을 추진했다”며 “소중한 성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이 길 뿐이라 생각하고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보물 지정에 힘을 쏟았다”고 말했다. 

경주 남산에 자리한 석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한 창림사지 삼층석탑도 보물 반열에 올랐다. 삼층석탑이 있는 창림사지는 그동안 조사된 탑지, 건물지 등으로 미뤄 통일신라시대 사찰로 추정된다. 탑은 추사 김정희(1786~1856년)가 창림사지를 찾았을 때 모사해 둔 ‘무구정탑원기(無垢淨塔願記)’를 근거로 신라 문성왕 때(855년)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다. 삼층석탑은 2중 기단을 조성한 후에 탑신부 3개 층을 얹은 전형적인 신라 3층 석탑 양식이다. 특히 탑에 양각한 팔부신중 조각은 규모와 기법에서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석탑은 그간 파괴된 상태로 방치돼 있다가 1976년 결실된 부재를 보강해 복원됐다. 이 과정에서 2, 3층 탑신과 상층기단의 팔부신중상 4매, 기단 석재 일부가 새로운 부재로 교체되는 등 탑의 원형이 상당 부분 훼손되기도 했다.

포항 보경사 적광전의 신방목에 새긴 사자상

경주 인근의 포항 보경사에는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사자상이 있다. 보경사 금당(金堂)인 적광전에 가면 전면 중심칸에 두 마리의 늠름한 사자상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기둥 밑에 놓이는 부재인 신방목(信防木)에 조각돼 있는데 국내에서는 그 유례가 드물다. 신방목은 보통 둥글게 만들고 태극문양을 새기기 때문이다. 조선 숙종 3년(1677)에 중창한 것으로 추정되는 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을 받치는 부재인 초석과 기둥 하부를 가로로 연결하는 부재를 받치는 부위인 고막이 등은 전형적인 통일신라기 건축 기법을 보여주고 있어, 신라 시대 고부재를 사용해 중창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주지 철산스님은 “역대 선지식들이 이 공간에서 부처님처럼 되겠다는 각오로 정진해 왔듯, 원력을 갖고 성보를 보존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72.

조선시대 금속활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꼽히는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권하 1의1~2, 2의1~2’도 보물로 지정됐다. 세조 11년(1465, 을유년) 간경도감에서 국역한 책을 바탕으로 한글 구결 부분만 편집해 금속활자인 을유자(乙酉字)로 간행한 불경이다. 을유자는 정난종(鄭蘭宗)의 글씨를 저본으로 만든 큰 자 중간자 및 작은 자 등 3종으로 구성된 금속활자다. 주로 불교 경전을 간행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시 유생과 조정 신료들의 강한 반대로 오랫동안 사용되지 못하고 10여년은 지난 1484년 갑신자를 만들었을 때 이를 녹여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을유자로 찍어낸 책은 남아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뿐 아니라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권하2의1~2는 을유자로 찍어낸 책 가운데 처음 공개되는 것이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김천 고방사 아미타설법여래도 .

 

대구 서봉사 지장시왕도

김천 고방사 아미타설법여래도, 대구 서봉사 지장시왕도,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2도 보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대구 서봉사 지장시왕도는 300여 년 전 조성됐지만 성보를 보존해온 스님들의 노력으로 제작 당시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특히 화기 부분이 완벽하게 남아있어 1741년에 수화승 세관스님을 비롯해 7명의 화승이 제작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경상도 지역에서 활약한 세관스님의 대표작인 직지사 삼세불도(1744년) 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된 성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은 1744년 그려진 삼존후불탱화와 함께 예배대상으로 조성된 점에서 조선후기 불전 건축의 내부 장엄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례로 꼽힌다.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2는 당나라 실차난타 스님이 신역한 주본 80화엄경 가운데 제72권에 해당된다. 고려대장경을 간행할 때 저본으로 사용됐던 수창 4년(1098) 판본의 국내 전래본으로 추정되며 불경과 불교학, 서지학 연구에는 물론 고려시대 목판 인쇄문화 연구에도 크게 활용될 수 있는 자료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김천 고방사 아미타여래설법도는 수화승 민원스님의 유일한 작품으로 세부표현과 기법에서 17세기 후반 불화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사진제공=문화재청

[불교신문3094호/2015년4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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