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주기 앞둔 진도 팽목항 현장

“아들, 딸에게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자주 자주 해주세요” 세월호 참사로 생때같은 외아들을 잃은 고(故) 오영석 군 어머니 권미화 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20여일 앞둔 지난 21일, 안산합동분향소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6시간을 달려 온 사람들에게 권 씨는 울음을 삼키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이들이 자꾸 물어요. 바닷 속에 있는 친구들이 많이 추울 텐데 왜 꺼내주지 않냐구요. 지난해 벚꽃 필 때 찍은 반 단체 사진에 한 명도 살아남은 애가 없어요. 그나마 구조된 애들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마음 놓고 울지도 웃지도 못해요. 혹시 자녀분이 있다면 제일 예쁘고 건강할 때 잘 해주세요.” 권 씨는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찾아준 30명의 사람들을 방파제 쪽으로 안내했다. 300여명의 생명을 집어삼킨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이날은 춘분이었다. 4.16가족대책위원회가 하루 두 번 안산합동분향소에서 진도까지 운행하는 추모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 외에도 봄나들이를 하러 나왔다가 잠시 들른 방문객들도 많았다. 주말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진도 조포에 있는 친가에 왔다가 팽목항에 들렀다는 하정현(16,서울 신림동) 군은 “단원고 친구들을 생각하면 슬프다”며 “놀러갔을 뿐인데... 실종된 9명의 사람들이라도 어서 꺼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강릉의 한 시민단체에서 온 박지호(54)씨는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아직도 추운 바닷속 선체 안에 남아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며 “가족분들이 아직 팽목항에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찬이라도 전해주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방파제를 둘러보던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한곳에 멈췄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방파제 벽 아래 길게 늘어선 손바닥만한 크기의 타일 400여장이었다. ‘기억의 벽’이라 이름 붙여진 타일 한 장 한 장에는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 시인, 방문객들이 색색의 물감으로 써 넣은 글귀와 그림들이 그려져있었다.

“엄마 남자애들 투닥투닥 장난치면 내가 논다 생각해, 아빠 여자애들 꺄르르르 웃으면 내 소리라 생각해” “우리 큰 딸 초예 엄마 아빠 딸로 와줘서 고마워” “기적처럼 태어났으면 기적처럼 돌아오세요” “오는 봄, 들판 이랑에 새싹으로 오리라” “깨박이 시연아,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엄마 잊어버리면 안돼 사랑해 내 딸”

가족들의 절절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방문객들은 타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애써 시선을 바다로 돌리거나, 코를 훌쩍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시종일관 착잡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파제에서 400미터 떨어진 곳에는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이 묵고 있는 조립식 주택 10채과 임시 분향소가 설치돼 있었다. 컨테이너로 지어진 조립식 주택은 전남도청에서 지난해 여름 가족들을 위해 마련해준 것이다. 6채는 안산과 진도를 오가는 가족들이, 3개는 경찰과 시민단체들이 사용한다. 나머지 1채는 참사로 동생가족을 잃은 권오복 씨가 머물고 있다. 권 씨는 참사 이후 하루도 팽목항을 떠나지 않고 있다. 동생 권재근(52)씨와 조카 권혁규(7)군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권 씨는 “실종자 9명 가운데 2명이 내 동생과 조카”라며 “시체를 찾을 때까지 팽목항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종자 단원고 2학년 조은화 양의 아버지는 “수색 종료시점에서 3개월이 지났다. 인양 결정을 해도 6개월의 검토기간이 걸리는 데 답답하고 지칠 뿐이다”고 밝혔다. 이어 “곧 세월호 1주기가 다가오는데 이대로 변함없이 2주기가 될까봐 그게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

진도 서남쪽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 방문객들이 하나 둘 떠났다. 낮에 밀물처럼 밀려왔던 사람들은 오후가 되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팽목항에는 또 다시 실종자 가족들만 남았다.

지난 11월 정부의 수습 중단 이후 조립식 주택 이외 모든 시설은 철수 됐다. 가족들이 묵고 있는 컨테이너 근처 천막 성당과 팽목항 입구 바로 앞 불교 임시 법당만이 남았다. 참사 이후 227일 동안 방파제 위에 있던 임시 법당은 설치물 문제로 잠시 철거됐다가 지난 16일 세월호 1주기를 앞두고 30일기도를 시작하며 다시 세워졌다.

조계종 긴급재난구호봉사단장 법일스님(진도 향적사 주지)과 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은 지난해 참사 이후부터 꾸준히 호남지역 사찰들과 연계해 세월호 가족들의 곁을 지켜왔다. 두 스님의 주도 하에 호남지역 사찰 스님들은 지난 227일 동안 하루 13시간의 기도를 한 데 이어 또 다시 하루 두 번 30일 기도에 나섰다. 평일과 주말, 매일 오후2시와 6시, 낮밤을 가리지 않고 목탁소리와 기도소리가 팽목항을 채운다.

이날 오후2시 임시법당에서도 어김없이 염불소리가 흘러나왔다. 방파제를 돌아 나오던 사람들이 기도소리에 이끌려 법당 안을 힐끗힐끗 쳐다봤지만 두 비구니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염불을 욌다. 6시가 되자 저녁 기도를 위해 법일스님과 금강스님을 비롯한 4명의 스님이 방파제를 찾았다. 임시법당의 두 비구니 스님도 함께였다.

세월호 1주기를 앞두고 다시 기도를 시작한 데는 절을 직접 찾아와 답답하고 슬픈 마음을 풀어달라는 가족의 간절한 요청이 있었다. 금강스님은 “가족들이 미황사를 찾아와 머물기도 하고 상담을 받고 가기도 한다”며 “세월호 참사를 겪은 가족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말했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 임시법당을 찾은 실종자 가족들에게 법일스님은 “건강부터 잘 챙기시라”며 “기도 열심히 올려드리겠다”고 위로를 건넸다.

스님들은 방파제 끝으로 향했다. 세찬 바닷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렸지만 방파제 양 옆에 걸린 연등을 하나하나 손보며 앞으로 나갈 뿐이었다. 방파제 끝에 다다르자 스님들은 세월호를 집어삼킨 바다 쪽을 향해 목탁을 들었다. 염불을 외는 동안 실종자 오영석 군 어머니는 절을 올리고 주저앉아 울기를 반복했다. 해무는 짙어졌고 어둠이 깊게 깔렸다. 목탁소리와 낮은 염불소리가 방파제 공기를 에워쌌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 소란을 떨어도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염불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꿈과 희망 가득한 이들이 차가운 남쪽 바다에 갇혀 가슴이 아픕니다. 가족들과 국민 모두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얻길 바랍니다. 부처님의 따뜻한 자비와 지혜가 함께하길.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 본사 석가모니불” 스님들은 실종자 9명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기도가 끝난 후에는 실종자 9명의 이름을 직접 써넣고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풍등을 가족들과 함께 날렸다. 실종자 허다윤 어머니와 아버지가 풍등을 잡고 날리며 외쳤다. “다윤아 돌아와라.” 이어 말했다. “스님 참 감사해요.”

이튿날 아침, 팽목항 방파제에는 장성 해인사에서 온 무학스님과 동자승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오후에는 다시 송광사 스님들이 팽목항을 찾아 기도를 올려줄 것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은 왔지만 온 것 같지 않다), 팽목항의 봄은 그랬다.

세월호 참사는 295명의 사망자와 9명의 실종자를 냈다. 참사 197일째인 지난해 10월29일 고 황지현 양의 시신이 수습됐다. 지난해 11월11일 정부는 세월호 수색을 중단했다. 고창석, 양승진,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권재근, 권혁규, 이영숙씨 등 실종자 9명은 아직도 차가운 바다 속에 있다. 세월호 침몰 당시 10여명의 학생을 구조한 ‘파란 바지 영웅' 김동수 씨는 지난 19일 사고 트라우마와 생계 곤란으로 고통을 겪다 자살을 시도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인양을 촉구하며 서울 광화문과 정부종합청사, 전국 곳곳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