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침사찰로 국가 제사 지내고 전쟁 때 백성 지켜내

1925년 대홍수 당시 700여 명의 목숨을 구한 봉은사에 세워진 청호스님의 공덕비. 사진제공=봉은사

오는 28일 9호선 봉은사역이 개통되면서, 서울 봉은사(주지 원학스님) 가는 길이 수월해졌다. 교통편이 좋아지면서 도심에서 만날 수 있는 천년고찰을 찾는 이들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민과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인 봉은사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자.

봉은사는 794년 연회국사가 창건해 지금까지 1200년 간 많은 이들의 귀의처가 돼 왔다. 또 조선시대에는 왕릉을 지키는 능침사찰로 제사를 지냈으며, 승과가 실시된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자 연산군은 선왕의 능침을 지금의 선릉으로 정하고, 성종의 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요구로 봉은사의 전신 견성사(見性寺)는 왕릉을 지키고 왕이 제사를 지내는 왕릉의 능침 사찰이 됐다. 견성사는 선릉 동쪽으로 이전해 중창불사를 했는데 1498년 불사가 끝난 뒤 봉은사라는 이름이 새롭게 지어졌다.

이어 1562년 중종이 묻힌 정릉이 선릉 옆에 지어지자 봉은사는 두 왕릉의 능침사찰이 됐으며, 특히 어선루(御宣樓)에는 유일하게 역대 왕들의 위패가 봉안되어져 수시로 제사를 지냄으로써 왕실사찰 가운데서도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됐다.

봉은사는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주지를 지낸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스님은 조선시대 중기의 대표적 선승인 동시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승병장으로 활약한 스님이다. 광해군은 스님을 봉은사에 머물게 하고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의 직함을 내렸다.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돼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이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전국 사찰에 “총궐기하여 오랑캐를 쳐부수자”는 격문을 보냈다. 이에 의승군을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 붙이고 3000명을 모았다고 한다.

근현대에 들어서는 대홍수 때 700여 명의 사람을 구하면서 자비를 실천했다. 1925년 5월 사흘째 비가 쏟아지면서 산사태가 나고 가옥이 침수됐다. 살림은 물론 사람까지 떠내려가는 큰 홍수로 가 나자 당시 주지 청호(晴湖, 1875~1934)스님은 배를 띄우고 물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했고, 옷과 음식을 나눠줬다. 당시 스님이 목숨을 건진 사람이 708명에 달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석학 대덕과 독립운동가, 예술가, 심지어 기독교 인사들도 스님을 기리며 시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것으로 <불괴비첩(不壞碑帖)>을 만들어 후대에 전하고자 했다. 도움을 받은 인근 주민들이 힘을 모아 스님을 ‘살아 있는 부처’라고 칭송하며 ‘수해구제공덕비’를 세웠는데 지금도 봉은사에 남아 있다.

추사 김정희의 친필 편액. 사진제공=봉은사

이밖에도 봉은사에는 1700년 한국불교역사를 대표하는 불교문화재들이 전해진다. 조선말기 대표적인 문신이자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가 직접 쓴 판전(版殿) 현판을 만날 수 있다. 보물 제321호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과 보물 제1819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등 국가지정문화재와 20점의 시지정문화재가 대표적이다.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