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 얻었어요”
“해인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 얻었어요”
  • 박인탁 기자
  • 승인 2015.03.18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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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은 정치이념에 따라 ‘통일의 꽃’과 ‘종북주의자’로 극명하게 달리 불리고 있다. 1989년 대학생이던 임 의원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다. 분단 이후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뒤 판문점을 거쳐 귀환했지만 곧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3년5개월 동안 복역했다.

하지만 임 의원은 더 이상 이념의 틀 속에 자신을 가두려 하거나 재단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지난 5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만난 임 의원은 “이념이 아닌 인간에 관심이 더 많다”면서 ‘인간 임수경’과 ‘불자 공덕주(임 의원의 법명)’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는 임수경 의원의 인생은 물론 종교마저도 뒤바꿔 놓았다. 어릴 적부터 성당에 다녔던 임 의원은 주일학교 교사생활을 하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수녀를 꿈꿨다. 하지만 방북 후 교도소 독방생활을 하며 성당과 차츰 멀어졌다.

당시 가톨릭에서는 주일미사에 빠지면 고해성사를 받도록 돼 있었지만 임 의원은 독방생활로 인해 3년 넘게 이를 지키지 못하면서 가톨릭과는 자연스레 거리가 생겼다. 이후 미국 유학시절, 교회를 다니기도 했다. 김치 등 한국문화에 대한 향수로 인해 미국 대학 내 교회를 잠시 다녔던 것이다.

임 의원의 불교와는 인연은 귀국 후인 1998년 스님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임 의원에게 사찰은 취미활동인 등산을 위해 잠시 들러 쉬거나 놀러가는 곳에 불과했다. 지난 2004년부터 해인총림 해인사가 발행하는 월간 <해인> 객원기자로 활약하게 됐지만 당시에도 한동안 해인사를 찾지 않았다.

몇 달 뒤 해인사를 찾은 임 의원은 스님들이 올리는 새벽예불의 웅장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임 의원은 새벽예불을 통해 그동안 자신이 몰랐던 다른 세계를 느끼며 불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게 됐다.

2005년 하나밖에 없는

아들 잃은 큰 아픔

불교를 통해 치유

가방조차 없이 들어온

해인사에서의 1년

삶의 가장 소중한 시절

“안나푸르나에 다녀왔을 뿐만 아니라 가야산을 100번 넘게 올라갈 만큼 등산을 좋아해요. 제 핸드폰 끝4자리인 ‘1433’은 가야산 정상인 칠불봉 1433m를 상징하는 숫자이지요. 국회의원 당선 후에는 한가하게 등산이나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 등산을 자제하고 있지만 등산은 제 취미생활이에요.”

임 의원은 지난 2005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는 크나 큰 아픔을 불교를 통해 치유하면서 불교에 심취하게 됐다. 필리핀의 한 리조트에서 사망한 아홉 살짜리 아들의 유골을 들고 해인사를 찾은 임 의원은 그대로 해인사에 눌러앉았다. 가방조차 들고 가지 않았지만 임 의원은 1년 넘게 해인사에 머물며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렀다.

법복으로 갈아입은 임 의원은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묵언하며 무작정 절을 올렸다. 누구와도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또 어떤 누구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주말이면 친구들이 면회를 왔지만 함께 돌아가자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해인사 스님들은 임 의원을 온전한 사람으로서 대해줬다. 불쌍하게 여기거나 부담스럽게 챙겨주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주며 기다렸다.

“당시 묵묵함, 묵언의 의미를 깨닫게 됐지요. 또한 내가 그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고, 바쁘게 살았다는 걸 깨달았지요. 가방조차 없이 해인사에 들어왔지만 1년 넘게 지낼 수 있는데다가 절에서의 시간은 온전히 제 자신의 시간이었기 때문이지요.”

불쌍하게 여기지도

부담스럽게 챙겨주지도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주며 기다려 줘

묵묵함, 묵언의 의미

내가 그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고

바쁘게 살았다는 걸 깨달아

49재까지만 해인사에 머물겠다고 생각했지만 바쁜 사중 일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던 임 의원은 일손을 거들기 시작하며 해인사에 차츰 정착해 갔다. 스님들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임 의원에게 일을 시켰다. 사중 일을 하면서도 매일 4차례 기도정진하는 4분정근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불교공부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때 시작한 이산혜연선사 발원문 낭독은 지금까지 이어져 매일같이 이를 통해 하루일과를 시작하고 있다. 절대자인 신에게 해 달라, 바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참회를 중시하는 불교를 통해 아들을 잃은 아픔도 조금씩 치유됐다.

“불교가 아니었다면 제가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회를 가슴깊이 이해하니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며, 단지 조금 일찍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특히 아들의 49재 막재를 88세 노보살님 막재와 함께 지냈는데 손자를 돌보듯 제 아들을 돌봐주실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그리고 며칠 뒤 해인사 종무원과 그 아들의 49재 막재가 있었는데 사모님을 제가 위로해줬어요. 누군가를 위로해줄 만큼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겁니다.”

임 의원은 해인사 대비로전 불사 기획홍보위원을 맡아 쌍둥이 바로자니불 친견법회 홍보물을 제작했다. 특히 몇 백 년 후에나 공개될 쌍둥이 비로자나불 복장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내외, 화주보살, 임 의원 등 재가자로는 4명의 이름만 들어가 자부심이 남다르다.

불교는 삶의 ‘철학’이자

함께 느끼는 ‘공감’

다음 생에 혹시

남자로 태어나게 된다면

출가할 생각…

임 의원은 1년 여 간의 해인사 생활을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시절이라고 강조했다. 자식 잃은 어미로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시절, 해인사 생활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절에 가는 게 중요한 일정일 만큼 임 의원에게 불교는 힘겨웠던 삶의 탈출구가 돼 줬다.

이를 방증하듯 임 의원은 지난 2006년 주민등록 주소지를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 해인사로 옮기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씩 주소지가 해인사로 돼 있는 주민등록증을 보면 나쁜 짓을 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또한 해인사를 재적사찰로 둔 첫 번째 국회의원이라는 영광도 임 의원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특히 임 의원은 1년 여 동안의 해인사 생활을 통해 출가도 심각하게 고민했다. 노보살들의 출가 권유를 통해 운문사와 청암사 등 비구니 승가대학을 운영 중인 사찰도 직접 찾아가봤다.

“제가 남자였다면 이번 생에 출가했을 겁니다. 비구와 비구니간의 현실적인 차이를 직접 지켜보면서 이번 생에서는 출가할 생각을 접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생에 혹시 남자로 태어나게 된다면 출가할 생각입니다.”

국회의원회관 내 임 의원 사무실 입구에는 세월호 노란 리본이 달린 연등이 걸려있어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또한 ‘우리차를 사랑하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제작한 명패에 임 의원은 호(號)를 넣는 여느 국회의원과 달리 해인사의 ‘해인’으로 자신을 소개해 놓고 있다.

물에서 외동아들을 잃은 임 의원은 지난해 4월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 이후 틈나는 대로 진도 팽목항을 찾았다. 지난해 6·4지방선거는 물론 추석도 팽목항에서 맞았다. 국회의원이 아닌 불자로서 기도하러 간 임 의원은 해인사 스님들이 자신에게 해줬던 것처럼 묵묵히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옆에 누군가가 있고, 목소리를 듣고 손을 내밀 수도 있다는 게 세월호 가족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일상생활 속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진상규명과 선체 인양 등이 무엇보다 시급한데 국가가 의무를 방기하고 있어요. 야당 국회의원이지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너무 힘드네요. 단지 제가 할 수 있는 걸 찾아 진도와 안산을 자주 찾아가고 있어요.”

20대 총선 출마 여부 등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임 의원은 부처님의 인연법에 따라 살게 될 것이라고 털어놨다. 채50세가 되지 않았지만 하루아침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체험했기 때문이다. ‘안 되는 것은 억지로 한다고 해도 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임 의원은 당과 국회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자신을 공천할 것이고, 국민 또한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뽑아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제 인생이 제 뜻대로 됐다면 해인사에도 가지 않았겠지요. 재선 준비를 하지 않는 저를 비웃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는 삶속에서의 ‘철학’이자 함께 느끼는 ‘공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연기법을 믿고 제가 맡고 있는 소임에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들을 차근차근 해나갈 것입니다.”

■ 임수경 의원은 …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난 임수경 국회의원은 서울 진명여고와 한국외대 불어과, 방송통신대 법학과, 서강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한국외대 대학원 신방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방북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2년 특별 가석방된 뒤 1999년 복권됐다.

문익환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과 방송위원회 남북방송교류추진위원, 언론인권센터 이사,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으며 한국외대와 성공회대에서 강의도 맡았다. 19대 총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비례대표로서 국회에 입성한 뒤 활발한 의정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현재 국회 정각회 간사를 비롯해 조계종 중앙신도회 지도위원, 대한불교청년회 지도위원 등을 맡아 불교 발전에도 앞장서고 있는 불자다. 또한 해인사에서 1년 여 동안 머물며 해인사 대비로전 불사 기획홍보위원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월간 <해인> 객원기자로 활동하는 등 해인사와는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사진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불교신문3088호/2015년3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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