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이란 무엇이며 왜 최고의 수행법인가

 

“간화선에서는

화두에 집중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대상으로 향하는

우리들 의식의 지향성을 멈추게 한다.

그것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든

아니면 나의 의식 속에 잠재되었다가

솟아나는 것이든

일체의 모든 것을 놓아버리라고 한다.

놓아버린다는 생각마저 없이

그저 무심하게 놓아버리라고 한다.

이렇게 해야만 일체의 번뇌가 소멸되어

우리 자신 속에 본래 간직된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자신 속에서 넘쳐나고

나아가 남에게도 미친다.”

 

 

간화선이라 말뜻을 먼저 설명해보면, 선(禪)은 선(禪)인데, 화두(話頭)를 관찰하는 선이라는 뜻이다. ‘간(看)’이라는 글자에는 ‘보다’라는 뜻이 들어있다. 우리말로는 ‘든다’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화두를 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선’은 무슨 뜻일까. 이 말도 단순화자면,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행위’를 뜻한다.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 방법으로 3학(學) 즉, 계(戒)·정(定)·혜(慧)가 있는데, 이 중 정학(定學)이 바로 ‘선’이다.

자 그러면 ‘선’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행위’라고 했는데, 어떤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불교의 역사 속에서 또 학파에 따라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어, 간단하지가 않다. 다만 요즈음 항간에 많이 소개되는 초기불교와, 또 조선시대를 통해 현재 우리에게 전승되는 전통적인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4념처경>에서는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을 대상으로 그것의 관찰에 집중하라고 한다. 한문 경전을 오래 동안 많이 번역하셨던 봉선사 운허 큰스님께서는 <불교사전>에서 4념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신념처 : 부모에게 받은 육신이 부정하다고 관하는 것. 수념처 : 우리들은 음행이나 자녀나 재물 등을 보고 이것은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로 이것은 진정한 즐거움이 아니고 모두 고통이라고 관하는 것. 심념처 : 우리들의 마음은 항상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늘 변화생멸하는 무상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 법념처; 위의 셋을 제하고, 다른 존재에 대하여 실로 자아인 실체가 없으며, 또 나에게 속한 모든 물건을 나의 소유물이라고 하는데 대해서도, 모두 일정한 소유자가 없다고, 무아관을 하는 것. 이런 4념처관을 따로 따로 관하는 것을 별상념처관이라고 하고, 위의 넷을 총체적으로 관하는 것을 총상념처관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대승불교권에서는 기본적으로 ‘사마타’와 ‘위파사나’, 한문으로는 지(止)와 관(觀)으로 표기하는데, 그 수행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여기에서 <대승기신론>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지’는 대상으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 작용을 중지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감각기관에 무언가의 대상이 접촉되면, 그 대상 쪽으로 마음이 쏠리게 마련이다. 마음이 쏠리면 바른 판단을 방해받게 된다. 이 말은 결국, 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쏠림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 ‘관’이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인연에 따라 생성소멸하는 모든 현상의 무상함을 알아차리는 행위를 ‘관’이라고 한다. 이렇게 ‘지’와 ‘관’ 수행을 점차적으로 닦아가되, 이 둘을 상호 유기적으로 수행하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각종 번뇌가 소멸되어, 사람들 저마다 본래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지혜롭고 청정한 기능’과 ‘불가사의한 업의 기능’을 누구나 발휘할 수 있다. 우리들의 ‘본마음’에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기능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있다고 한다. 다만 살아가면서, 또는 윤회를 해오면서, 그런 ‘본마음’에 ‘때’가 묻어서 때로는 몸으로, 때로는 입으로, 때로는 마음으로, 어리석은 짓을 한다는 것이다. ‘때’는 번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결국은 번뇌 때문에 업을 짓는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사용한 ‘본마음’은 ‘번뇌를 골라내어 소멸시킨 상태에서 나타나는 마음의 기능’이다. 전문용어로 ‘택멸법(擇滅法)’이라고 일컫는다. 약간 머리가 복잡해질 수 있지만, 이 개념을 분명하게 알아야만, 대승불교의 경전이나 논서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法]는 ‘만들어진 것’과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크게 나뉜다. 전자를 ‘유위법’이라 하고, 후자를 ‘무위법’이라고 한다. 유위법은 무상하지만, 무위법은 생주이멸하지 않고 영원하다. 이 무위법에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 ‘열반’이고, 둘째는 위에서 말한 ‘택멸’이고, 셋째는 ‘비택멸’이다. 핵심은 ‘본마음’은 무위법이라는 것이다. 결국 불교는, 유위법의 무상성을 깨쳐 그것에 휘둘리지 말고, 무위법의 영원성을 누리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 열반의 체험이다.

대승에서 말하는 열반의 상태에는 네 가지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 즉 상락아정(常樂我淨)이 그것이다. ‘상’은 상주의 뜻으로, 완전한 열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멸변화가 없다. 다음으로 ‘락’은 안락의 뜻으로, 완전한 열반에는 생사의 고뇌가 없고 무위 안락하다. 다음으로 ‘아’는 진아(眞我)의 뜻으로, 완전한 열반에는 여덟 종의 자재한 덕을 갖추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정’은 청정의 뜻으로, 완전한 열반에는 미혹이나 고통의 업이 없어 청정한 기능을 갖추었다고 한다. ‘본마음’에서는 크게 이런 네 가지 종류의 기능이 간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간화선’에서 ‘선’이 무엇인가로 돌아가자. 위에서 필자는 ‘선이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선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또 각 학파에 따라 집중하는 대상은 다르지만, 집중해서 관찰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화두를 관찰하는 간화선도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무엇을 관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가. 곧 효과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관찰해야 할 대상이 많으면 복잡해진다. 반면 간단할수록 쉽다. 방법은 단순 명료해야 한다.

선종에서는 저마다의 ‘참마음’을 관찰해서 번뇌를 소멸시키고자 한다. 너절한 이런저런 관찰의 대상을 모두 그만두고, ‘참마음’을 관찰하자는 것이다. 선종에서 내거는 구호, 견성성불(見性成佛), 직지인심(直指人心)이 바로 그것이다.

선종 이외의 모든 불교, 그것이 대승이든 소승이든 모두가 관찰의 대상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관찰해야 할 것들은 거의 무한대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모든 존재는 그것이 마음속에 있든 마음 밖에 있든 ‘참마음’의 작용에 입각해서 임시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대승교학의 기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참마음’은 위에서 언급한 ‘택멸법’이다. 이는 곧 무위법으로, 그것은 번뇌를 소멸시킨 상태에서 들어나는 것이다.

참선 수행을 성공적으로 하면, 열반의 네 가지 속성, 즉 열반 4덕, 즉 상락아정이 밖으로 드러난다. 선종에서는 ‘마음’ 관찰을 제대로 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서, 수행자들끼리 수많은 대화를 한다. 이런 대화가 ‘화두’이고, 화두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의미 단위가 ‘공안’이다.

간화선에서는 이런 화두에 집중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대상으로 향하는 우리들 의식의 지향성을 멈추게 한다. 그것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든, 아니면 나의 의식 속에 잠재되었다가 솟아나는 것이든, 일체의 모든 것을 놓아버리라고 한다. 놓아버린다는 생각이나 티도 없이 그저 무심하게 놓아버리라고 한다. 이렇게 해야만 일체의 번뇌가 소멸되어, 우리 자신 속에 본래 간직된 상락아정, 곧 열반의 네 가지 속성이 자신 속에서 넘쳐나고, 나아가 남에게도 미친다고 한다. 요컨대 간화선은 번뇌를 소멸시키는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무자화두’ 하나가 일체의 모든 관찰 수행법을 섭렵하는 것이다.

[불교신문3088호/2015년3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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