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無遮)의 이론과 불교사상
‘관습과 통념 벗어나 참나 찾으라’

지난 2013년 4월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간화선 대법회 현장. 한국불교의 정신적 자산인 간화선을 대중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불교신문 자료사진

“진제 큰스님 오늘 이 대법회가 무슨 법회요?” “허물이 만천하에 가득합니다.” “그르쳤다. 나랑 차나 한잔 하자, 내려와.” “억!” “내려와!” “억!”

지난 2002년 10월 부산 해운정사에서 열린 국제무차선법회의 한 장면이다. 당시 법회의 법주(法主)를 맡았던 해운정사 조실 진제 종정예하와 어느 스님 간에 오간 문답이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두고 당장 법석에서 내려오라는 스님의 ‘반말’은 대단히 무례하다. 동시에 국내외의 불자들이 모여 불법(佛法)을 논하는 성스러운 자리를, 한낱 허물덩어리에 비유한 종정예하의 반응도 자못 낯설다. 한 외국인 스님이 불쑥 나타나 종정예하의 앞에 놓인 마이크를 냅다 치워버린 일은 또 하나의 ‘불상사’였다. 물론 1998년 8월 고불총림 백양사 무차선 법회에서 재가신도에게 법사 스님이 뺨을 맞은 사태에 비하면 약과다.

 

불교 본연의 평등과 자비 정신 함축  

이렇듯 무차선법회는 얼핏 하극상과 뚱딴지의 난장판인 듯하다. 그러나 겉모습에만 얽매이면 불교 본연의 평등과 자비의 가치가 숨어있음을 놓치기 십상이다. 무차(無遮)란 말 그대로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구나 자유롭게 선(禪)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자신의 진면목을 당당하게 펼쳐보일 수 있는 마당이 바로 무차선법회다. 법랍도 직위도 무의미하다. 아울러 아랫사람이 중생심을 떨쳐낼 때, 어른 스님은 ‘어른’이라는 체면을 내려놓는다. 흔쾌히 불경과 굴욕을 감수하며 상대를 온전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오로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만나는 일이니, 분별과 가식이 끼어들 틈이 없고 거친 만큼 순수하다.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뿌리는 선종(禪宗)이며 임제선을 계승하고 있다.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 이후 동아시아에는 무수한 선사들이 배출됐다. 그 가운데 발군을 꼽으라면 중국 당나라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가 빠지지 않고 추천된다. ‘무위진인’이라는 독창적 개념으로 구구한 선종사에 이름을 남겼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은 ‘자리 없는 참사람’이란 의미이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신분과 처지에 굴하지 않는 사람’ 등으로 의역될 수 있다.

‘삼라만상이 본래 부처’라는 즉불(卽佛)의 논리에 기반한 무위진인은 곧 대자유인을 가리킨다. 모두가 청정하고 완전한 존재임을 알고, 빈부(貧富) 고하(高下) 시비(是非) 등등 이런저런 ‘손가락질’에 개의치 않으면서 꿋꿋이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삶이다. “문득 부처님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남의 보배나 세어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증도가(證道歌>.” 예컨대 투철한 깨달음으로 매사에 자유자재한 선사들의 언행을 ‘활발발하다’고들 한다. 활발발(活鱍鱍)이란 팔팔하게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의 행태를 빗댄 말이다. “형상도 근본도 없으며 머무르는 바 없이 싱싱하게 살아 움직인다<임제록>.” 무차선법회는 그렇게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이들의 대면인 셈이다.

한편 해운정사 무차선법회에서 종정예하가 모 스님과 나눈 문답을 일컬어 법거량(法擧量)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대화를 통해 깨달음의 무게를 재는 일이다. 선가의 오랜 전통인 법거량은 정해진 형식이 없으며 즉흥적이고 돌발적이다. ‘덕산방 임제할’이라는 고사에서 보듯 고함(할, 喝)과 몽둥이(방, 捧)가 난무한다. 앞서 종정예하가 외친 “억!”이 바로 할이다. 일례로 마조도일 선사는 제자인 백장회해 선사의 코를 쥐어뜯으며 각성을 촉구했다. 심지어 구지(俱脂) 선사는 선승들을 흉내 내는 동자승의 손가락을 자르면서 본때를 보였다. 고양이를 두 동강내버린 ‘남전참묘’의 일화도 유명하다.

다만 선사들의 ‘폭력’은 세속에서 일어난 폭력과 극명한 차이를 지닌다. 이득을 취하기 위함도 권력을 얻기 위함도 아니다. 미혹(迷惑)을 부수기 위한 폭력이지 인격을 부수기 위한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 이해타산과 분별망상에 휘둘리지 말고 생각 이전의 자리에서 ‘참나’를 온전히 느끼라는 주문이다. 조사선이 지향하는 격외(格外)의 도리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관습과 통념으로 규정된 ‘나’를 넘어, 영원한 불성으로서의 ‘나’를 깨우치라는 따끔한 가르침이다. ‘부모미생전 본래진면목(父母未生前 本來眞面目,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이란 화두에도 대자유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팔공총림 동화사 유나 지환스님은 “우리는 본래 부처인데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나’라고 동일시함으로써 무한한 부처님의 생명력이 탐욕으로 굴절되어 나타난다”며 “조건과 현상으로서의 망념이 아닌 마음의 본래자리를 통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성(自性)을 깨우치려는 사람에게 무차선법회는 훌륭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조사선(祖師禪)의 결실이자 최고의 수행법으로 각광받는 간화선(看話禪)에 매진해온 수좌 스님들의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선연(善緣)이다. 특히 오는 5월 열리는 세계 간화선 무차대회엔 해외의 고승들도 초청돼, 불교의 세계적 위상과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선사들의 탁월한 기봉(機鋒)이 살아 숨 쉬는 법거량을 직접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기백 넘치는 활구(活句)들에 골똘히 빠져들다 보면, 신분이 어떻든 처지가 어떻든 자기 자신이 원래 부처였음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차대회의 역사와 특징 

백성에 법문과 선물 베풀며

‘중생구제’ ‘국민통합’ 실천해

 

인도 아쇼카왕 재위 시부터

전 계층 위한 나눔으로 ‘확대’

 

종단 차원 ‘시민초청 무차대회’

한국불교의 사회적 위상 높여

2013년 6월 조계사에서 공양을 대접하고 문화공연을 마련해 소외된 이웃을 위로한 시민초청 무차대회.불교신문 자료사진

무차회(無遮會)는 범어(梵語, 산스크리트)로 ‘판카-파리사드(Panca-parisad)’라고 부른다. 승속(僧俗) 귀천(貴賤) 상하(上下)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대중에게 법재(法財)를 보시하는 법회를 의미한다. 이날만큼은 누구나 동등한 입장에서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공평하게 선물을 받아갈 수 있었다. 바다와 육지를 떠도는 영가들에게 시식을 베푸는 수륙재(水陸齋)가 죽은 자들을 위한 위로라면, 무차회는 살아있는 생명을 보듬는 일이다. 재물은 살림에 도움이 되고 스님들의 법문은 희망을 선사하게 마련이다. 곧 무차회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편안케 하며 요익중생을 실천하는 법석인 셈이다.

무차회는 불교가 태동한 고대 인도 당시부터 널리 행해졌다. 부처님이 쉬라바스티에 머물 때 장자(長者) 람달이 무차대회를 열고 5000명의 바라문을 공양했다는 기록이 <법구경> 술천품(述千品)에 나온다. 람달은 무려 5년 동안 옷과 약, 진기한 보물과 제사용품을 공급하고 마지막 날에는 무려 8만4000가지의 물건을 보시했다고 전한다.

사회 전 계층을 향한 나눔으로 확대된 무차회는 아쇼카왕(재위 BC 268~232)이 시초였다고 전해진다. 인도를 통일한 후 독실한 불자가 된 아쇼카왕은 선지식을 모시고 모든 계층에게 두루 재물과 법문을 보시하며 불교의 동체대비의 정신을 실천했다. 이후 무차회는 정법을 실현하기 위한 대화와 소통의 장으로 정착했다.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중국에서도 무차회는 활성화됐다. 특히 남북조시대 남조의 양을 건국한 무제가 열심이었다. 아쇼카왕이 인도의 전륜성왕이라면 양무제(梁武帝)는 중국의 불심천자(佛心天子)다. 단주육문(斷酒肉文)을 공포해 술과 고기를 금하고, 수라상엔 맨밥과 간장만 올리는 등 스스로 금욕과 검소를 몸소 행한 인물이다. 이와 함께 육조혜능 스님의 제자인 하택신회 선사가 연 무차선법회 등 각종 선서(禪書)에도 무차법회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보인다.

무차회는 대부분 나라의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행사였다. 불법의 공덕이 중생들에게 골고루 미치도록 하자는 것이 무차회의 1차적인 의의지만, 왕이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달래고 민심을 수습하려는 의도에서 마련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선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에 성행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서기 940년 신흥사 공신당(功臣堂)을 신축하면서 무차대회를 열어 백성들을 격려했다. 아울러 고종 3년(1216)과 의종 19년(1165)에도 무차대회가 거행됐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과거제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는 등 고려왕조의 기반을 닦은 제4대 임금 광종은 귀법사에서 여러 번 무차대회를 열어 개국공신의 명복을 빌고 민심을 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펼친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계는 타격을 받았고 무차회도 위축됐다. 다만 명종 재위 시 회암사를 중수하면서 허응보우 스님의 발원과 문정왕후의 시주로 대회가 열렸다고 전한다.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무차회는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방한암스님에 의해 부활한다. ‘오대산 호랑이’로 불리며 한국불교의 선풍을 복원하려 힘쓴 한암스님은 1912년 금강산 건봉사에서 무차선회를 개최하면서 간화선의 대중화에 나섰다. 무엇보다 건봉사 무차선회를 계기로 무차회의 성격이 달라진 점이 주목된다. 시행주체는 왕실에서 사찰로 바뀌었고 ‘나랏님’의 시혜에서 사부대중의 결집으로 변모했다. 무엇보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이해와 숙의를 통해 불자들의 의식이 성숙되고 토론문화가 창달됐다.

최근까지 여러 사찰에서 수많은 법회가 봉행됐지만, 무차선법회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던 중 1998년 8월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옹스님이 고불총림 백양사에서 한암스님 이후 86년 만에 ‘참사람무차선회’를 열어 다시 각광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선사였던 서옹스님은 무차선회를 통해, 무위진인에 근거를 둔 ‘참사람운동’을 설파하며 인류문명의 대안을 제시했다. 무르익은 열기는 2002년 10월 현 진제 종정예하가 부산 해운정사에서 개최한 국제무차선법회가 이어받았다. 종정예하를 비롯해 한국 중국 일본의 고승이 법문을 설하고 한바탕 법거량을 겨룬 국제무차선법회는 간화선의 진수를 보여주며 무차회의 모범으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총무원장 자승스님이 취임한 이후 2012년부터 매년 종단 차원에서 열고 있는 ‘시민초청 무차대회’ 역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해고노동자와 장애인 등 불우이웃을 초청해 공양을 대접하고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덜어주는 무차대회는 불교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을 변화시켰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헌신하는 불교의 모습이 뇌리에 새롭게 각인된 것이다.

[불교신문3088호/2015년3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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