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남편과 싸우고 고부갈등 극심…“명절이 두려워요”

“명절증후군이라고 하잖아요. 저도 정말 명절이 두려워요. 상차림을 혼자 다해야 해서 일단 몸이 너무 피곤하고요. 게다가 시댁 식구들은 왜 남의 일인 양 도와주지도 않고 저에게만 모든 일을 다 떠넘기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그게 장남과 결혼한 맏며느리의 도리라는 건 저도 알겠어요. 그렇지만 말이라도 한마디 좀 따듯하게 해주면 안되나요? 특히 시어머님은 얼마나 매서우신지 제가 하는 것마다 다 불만이시고, 잘했다 칭찬 한 번 없으시니 눈마주치기도 무섭고 늘 눈치만 보게 됩니다. 시댁에 들어설라치면 가슴이 콱 막히는 게 정말 어디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기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우리 어머님들이, 우리 자매님들이, 우리 아내님들이, 호랑이굴 속에서 정신 바짝 차리시고 초인 같은 힘으로 홀로 일구어 오신 그 시간들이 이 민족의 명절을 만들었군요. 부엌의 조리대 앞에 서 계신 그 작은 뒷모습에 한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응석부리며 업혀 있네요. 진정으로 대단하십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본인께서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확인해 보세요. 본인이 안계셨더라면, 명절에야 겨우 나눌 수 있는 이 가족의 모임이라는 귀한 시간이, 애초 성립조차 불가능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물 한방울 안 묻히는 남편이, TV 앞에서 연예대상이나 보고 있는 올케가, 컴퓨터 게임에만 빠져 있는 시동생이, 점잖 빼고 앉아 계시기만 하는 시어머니가 대체 뭘 할 수 있겠어요. 방해나 안하면 다행이죠.

명절 상차림은 왜 혼자?

시댁 식구들 다 떠넘기고

말이라도 따듯하면 좋은데

시댁 문 앞 호랑이굴 같아요

이것이 의무라는 사실에 스스로 동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기회입니다. 그 사실에만 동의하세요. 본인이 한 가족의 존폐를 결정짓는, 유일하게 가장 중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본인이 명절에 모든 일을 다 떠맡게 되는 것은 본인이 제일 아래에 위치한 하녀고, 다른 가족들이 상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는, 다들 자기 손으로 밥 하나 못해먹는 철부지 아이가 되어 ‘엄마’를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엄마’ 말이죠. 특히 가부장적 유교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에서는 명절 때 특히 ‘엄마’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마음의 움직임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왔습니다.

한번 떠올려보세요. ‘엄마’의 손을 타지 않고 치러질 수 있는 명절은 전혀 없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잊고 살던 ‘엄마’의 존재가, 명절이라는 특별한 날을 맞아 얼마나 그 존재감이 두드러지게 되는지요. 이처럼 모든 명절은 우리 모두가 ‘엄마’에게 덥석 업혀 ‘엄마’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 존재의 감사함을 기억하게 되는 날입니다.

본인께서 명절을 치르는 일이 너무나 힘드실 때, 지금 그 자리에 ‘엄마’가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해보세요. 그러면 그 ‘엄마’의 위대함에 스스로 감동받게 되실 거예요.

“아, 이 모든 일을 홀로 해내며, 모든 아이들에게 맛난 음식을 먹이고,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계신 우리의 ‘엄마’가 여기에 있구나. 그녀는 너무나 위대한 존재구나.”

네. 본인이 바로 그렇게 위대한 존재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발견하게 된 시선으로 시어머니를 한번 봐보세요. 거기에도 바로 ‘엄마’였던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본인이 ‘엄마’였다는 감동의 사실을 모르고, 그저 며느리라는 역할의 의무에만 강퍅한 시선을 보내고 계신 분이 거기에 앉아 계십니다.

그래서 사실 시어머니는 질문자님을 가혹하게 대하고 계신 게 아니에요. 그저 ‘엄마’라는 감동과 감사함을 누리지 못해 의무적으로만 살아오신 자기 자신에게 가혹하신 것이에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의무 아니라 기회라 여기고

‘엄마’에 의지하는 철부지들

시어머니 또한 위대한 ‘엄마’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엄마’가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에 대해 우리가 지금 알게 된 사실을, 시어머니 또한 아실 수 있게끔 전해보는 것뿐입니다. ‘엄마’였던 시어머니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였는지, 얼마나 감사한 존재였는지에 대한 감동을 나누는 일이 필요할 뿐입니다.

질문자님이 과거의 ‘엄마’였던 시어머니에게 감동받을 때, 시어머니도 지금의 ‘엄마’인 질문자님에게 감동받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감동받는 자에게 감동받는 법이거든요.

이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알아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질문자님은 그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시어머니의 마음을 처음으로 알아준, 시어머니의 유일한 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한 시어머니도 왜 질문자님 혼자만 고생하게 두느냐며. 우주에서 가장 든든한 ‘엄마’의 편이, 즉 질문자님의 편이 되어주실 것이에요.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자를 위해서라면, 그의 편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바로 이것이 감동의 나눔으로 펼쳐지는 현실, 즉 공감의 현실입니다. 본인의 ‘엄마’에게, 그리고 시어머니의 ‘엄마’에게 공감해보세요.

[불교신문3082호/2015년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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