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각존자 신미 평전, 훈민정음의 길>(박해진 지음 나녹)

1443년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혁명같은 일이었다. 한글로 인해 우리는 IT 강국을 이룩하고, 문맹율은 제로에 가까운 나라가 됐다. 그런데 최근 10여 년 사이 한글 창제와 관련해 혜각존자 신미대사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보은 법주사 산내암자인 복천암에 모셔진 신미대사 진영

최근에서야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집현전 학자들보다 많은 역할을 한 신미스님의 행적이 단편적으로 알려졌다.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인물 신미대사. 문화재 기록가인 박해진 씨가 최근 <혜각존자 신미 평전, 훈민정음의 길>을 펴냈다. 원고매수 5400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담은 이 책은 “지난 12년간 신미대사의 흔적을 찾아다닌” 저자의 역작이다. 지난 1월27일 종로의 한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복천암 큰스님이 한글창제
관여했다는 老보살의 말에
신미스님 일대기 연구 시작해

출생에서 출가, 입적까지
12년간 각종 문헌 찾아내…
일생과 업정 정리한 ‘평전’

“2002년 법주사 대웅보전 해체 때 기록자로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마당을 서성이다가 법당 노보살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복천암 큰스님이 한글 창제에 크게 관여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박해진 씨는 의아했다.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것 아닌가. 그런데 스님이라니. 의구심에 복천암을 찾아 월성스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박해진 씨는 신미스님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당시만 해도 신미스님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었다.

“불교대사전과 여러 자료를 찾아봐도 정확한 출생, 입적 기록이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영산 김씨 본 고향을 찾아 족보를 찾는 일에서 신미스님과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신미스님은 1403년 김훈의 맏아들로 서울서 태어났다. 이름은 수성(守省). 어머니는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이행의 딸이었다. 사대부 집안 가문서 태어난 수성은 성균관에서도 총망받던 인재였다. 하지만 옥구진병마사로 있던 아버지 김훈이 조모상을 치르지 않고 임지를 떠났다는 이유로 집현전 학자였던 박팽년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이 일을 지켜본 김수성은 양주 회암사에 주석하고 있던 함허당에게 출가했다.

“이 기록을 찾는데만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조선불교의 법맥을 이해하는데만 4년이 걸렸습니다. 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각종 문헌에서 ‘신미’란 두 글자만 찾아다녔습니다. 알면 알수록 큰 스승이고 신기한 인물이 신미스님이예요. 훗날 세조가 피부병 치료를 위해 법주사에 몇 번 행차를 했는데, 내실은 그곳 복천암에 주석하고 있던 신미스님을 만나려는 목적이 더 컸다고 봅니다. 신미스님과 세조는 한글창제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창제후 경전을 함께 번역해 내놓았던 인연입니다. 또 세조가 없었더라면 한글은 영영 묻혀져 버렸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창제에 관여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박해진 씨는 <훈민정음의 길>에 대해 여기저기 조금씩 남았던 흔적을 모아, 씨줄과 날줄을 엮듯 기록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박 씨가 찾아낸 기록을 보면 신미스님은 당시 성리학의 일인자로 칭송받던 외할아버지 이행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범어를 통해 음운의 규칙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문자는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문명과 철학이 조합을 이룬 정치적 산물입니다. 삶의 의미와 국가의 존재를 담은 글이 훈민정음이었지요. 훈민정음은 바른 소리로 바른 세상을 열겠다는 세종과 신미 두 분의 마음이 합해진 결과물입니다.”

박 씨는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훈민정음 곳곳에 숨겨진 신미코드”를 발견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안평대군의 글씨인데, 모두 33쪽으로 이뤄져 있어요. ‘나랏 말이 듕귁에 달라~’로 된 문장은 108글자입니다. 천지인 원리는 곧 불교에서 불법승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또 각종 언해 등 자료를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법수(法數)의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시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연구를 하면서 박 씨는 몇 번 꿈에서 신미스님을 만났다고 한다. 그럴때 왜 나를 이 고생시키는가 항의도 했단다. 얼마나 이 작업에 작가가 집중을 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박 씨는 지난 12년동안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몇 번 이고 중단할 생각을 했다.

“그럴 때 즈음, 신미스님과 관련된 새로운 기록을 접하곤 했어요. 새로운 자료를 구하면 호기심에 몇 달이고 매달리게 되고. 그러다 보니 12년이 지나버렸습니다.” 대표적인 책이 허균의 문집과 신미스님의 동생인 김수온의 문집 등이다. <복천사기>도 중요한 자료가 됐고, 복천암 부도밭에서 신미스님의 부도를 찾아내 입적에 대한 기록도 얻었다. 또 세종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경복궁에 내불당을 건립한 내용과 당시 유학자들의 반대 상소내용도 정리했다.

“세종은 문종을 통해 신미스님에게 우국이세, 즉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한 국사라는 법호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성종 이후 곳곳에서 신미스님의 기록이 의도적으로 사라집니다. 신미스님이 스스로 자료를 남기지 않은 것인지, 후대 유학자들이 의도적으로 기록을 지운 것인지는 더 살펴야 할 일이지만, 유학에 정통하면서 불교학을 통달했던 신미스님이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존재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12년의 대작업을 마친 저자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동안 기록을 정리한 다른 책을 꺼냈다. 15000매 분량의 원고가 담긴 제본집인데, 이를 반으로, 다시 1/3로 줄여 이번에 <훈민정음의 길>을 펴내게 됐다고 한다.

“책을 엮었지만 아직도 신미스님에 대한 여운이 가라앉지를 않습니다. 아직 다른 생각은 해본 것이 없네요.” <훈민정음의 길>은 얼필 학술서 같은 편집이지만, 문장이 자연스럽고 간결해 위인전을 읽는 느낌을 준다.

저자 박해진 씨는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으며, 1984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 부분이 당선됐다. 기업체 홍보실에서 근무하다가 1998년부터 고건축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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