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토대로

‘붓다로 살자’고 하는 것은

어떤 전제조건도 두지 않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

거리가 있다 …

‘붓다의 가르침대로 살자’고

설명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오래전부터 화엄사상과 생명평화사상으로 세상과 어울려온 도법스님은 최근 ‘붓다로 살자’라는 결사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비판적으로 보자면 ‘붓다로 살자’라는 타이틀과 그 내용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합 되는 정확한 언어인가를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도법스님에게 ‘붓다로 살자’에 대한 반박 글을 드렸고 스님은 내게 공개토론을 제안하였다. 까마득한 후배임에도 선뜻 공개토론을 제의한 도법스님에게 감사드린다. 예정된 토론에 앞서 몇 가지 질문을 미리 드리고자 한다.

첫째 스님은 본래부처이기 때문에 특별한 수행을 통해 다시 붓다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하면 즉각 도둑놈이 되듯이 누구든 지금 당장 부처의 말을 하거나 부처의 행위를 하면 부처라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도법스님이 이해한 ‘부처의 의미’와 ‘부처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붓다로 살자’는 말이 ‘착하게 살자’ 혹은 ‘양심적으로 살자’라는 말과 어떻게 다른지 묻고 싶다.

둘째 불교는 ‘나를 믿어라’, ‘나를 따르라’고 가르치지 않는 종교다. 다만 ‘와서 보라’고 가르치는 종교이며 이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강조하는 다른 종교에서 엿볼 수 없는 불교의 탁월함이다. 그런데 ‘붓다로 살자’는 대승경전의 ‘일체중생실유불성’과 ‘본래성불’에 대한 믿음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믿음을 토대로 ‘붓다로 살자’고 하는 것은 어떤 전제조건도 두지 않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붓다의 가르침대로 살자’고 설명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셋째 대승불교는 출·재가자 모두를 보살로 묶어서 ‘보살로 살자’는 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보살의 의미는 초발심을 낸 중생부터 깨달음을 이룬 보살마하살까지를 포함하기에 교리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모순이 없다. 그런데 궁극의 깨달음을 성취한 자를 의미하는 ‘붓다’는 초발심을 발한 사람과 성인이라 불리는 사다함 아나함 등과도 차별되는 한정적인 의미이다. 대승불교의 탁월한 사상인 ‘보살’을 놔두고 왜 ‘붓다로 살자’라는 결사운동을 펼쳐야 하는가?

넷째 우리가 아무리 ‘붓다로 살자’고 주장하고 다짐 하더라도 인생의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내가 붓다가 아닌 것이 드러난다. 어느 순간이든 탐진치의 광풍이 휘몰아치면 때때로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의 행위가 붓다의 생각과 말에서 벗어났음을 번민하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시작되었고 믿음의 불안전성 때문에 생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죽을힘을 다해서’ 다시 ‘붓다로 살자’고 다독여야 한다면 믿음이 약해졌을 때 다시 믿을 것을 강조하는 종교와 무엇이 다를까?

도법스님은 ‘본래부처’를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원리와 가능성’을 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듯 본래 붓다인 우리가 붓다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프지만 건강하게 살자’ 혹은 ‘눈 감고 있지만 눈 뜨고 살자’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붓다로 살자’는 것이 처음에는 쉽고 대중적인 것 같지만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언어이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임의대로 생각하는 불교, 추측하는 불교, 갈등하는 불교, 소통을 방해하는 불교로 흘러갈까 우려된다.

[불교신문3077호/2015년1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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