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허스님과 ‘한국독립운동사’

한국 근대 불교의 대종사이며 불경 번역의 위업을 선도한 운허(耘虛, 1892-1980, 사진)스님은 불문(佛門)에 귀의하기 전부터 우리의 국권을 강탈한 일본에 대해 해방까지 독립운동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스님은<무궁화>란 시를 쓰면서도 스스로 “무궁화동산을 가꾸는 사람(槿園耘人)” 이라 할 정도로 평생의 ‘애국인’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1963년 3월1일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장과, 입적 후, 1991년 8월15일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한 평생 독립운동 헌신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스님의 속명은 이학수(李學洙)로서 춘원 이광수는 동갑의 8촌 형이다. 1912년 21세에 ‘105인 사건’으로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대성중학교가 폐교되면서 공적 교육을 마감한 이학수는 만주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봉천성의 환인현에서 윤세복(尹世復)이 건립한 민족학교인 동창학교(東昌學校)의 교원으로서 윤세복 김형(영숙) 이극로 등과 그 분이 평생 걸은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의 길을 시작하였다. 이시열이 지은 동창학교 교가의, “자나 깨 나 쉬지 말고 분발하여서 일심으로 덕성 함양 학문을 닦고, 어둔 사회 광명토록 노력하여서 반만년의 우리 역사 빛나게 하자”는 가사는 우리에게 짙은 계몽적 애국심을 보여준다.

이 때 그의 이름을 이시열(李時說)로 고치고,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로 귀의하여 호를 단총(檀叢)이라 하였다. 이 호에서도 그의 민족의식이 명백하게 보인다. 이시열은 조국의 광복을 위한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에 가입하였는데, 윤세복 김동삼, 안희제 신백우 등 80여명이 가입한 신민회 계열의 이 비밀 구국단체는 광복까지 활동이 계속되었다.

1919년 3·1 운동 후, 등사판 통신 <경종(警鐘)>을 발간하고 서로군정서의 기관인 한족회의 기관지 <한족신보>의 사장과 주필로서 활동하며 광한단 결성에 참여하고 상해에서 흥사단에도 가입하였다.

1921년 각 독립운동 단체와의 연락과 자금조달을 위해 입국해서 조우석과 김종봉, 박용하(朴龍夏)로 이름을 고쳐가며 활동했으나 왜경의 감시가 심해 강원도의 봉일사에 일시 피신했다가 불교에 귀의하였다. ‘스님 박용하’로서 금강산 유점사를 거쳐 광릉의 봉선사로 와서 월초(月初)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이곳을 평생 머물 곳으로 정하였다.

이처럼 운허스님은 불문에 귀의하기 전 10년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한국에서는 맹렬한 불교의 수행인으로서 불교인의 교육과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특히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의 전입 이래 최초로 한자로 된 불경을 국역하는 사업을 주도하여 우리 불교사에서 뿐 아니라, 민족문화상 불후의 대위업을 달성하였다.

해방 후 우리 땅에서 스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건 항상 애국인으로서 교육입국의 열정으로 평생 헌신하였음을 우리가 잘 안다. 그러나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역사로 기록한 <한국독립운동사> 저술에 크게 기여 한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평생 일기를 써 온 스님은 전쟁 속 피난 중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도 김승학(金承學)이나 신백우(耕夫 申伯雨) 등 옛 동지들을 만나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저술을 논의, 계획, 협력하였다.

‘한국독립운동사’ 저술

운허스님은 한국독립운동사 편찬회 편집국장으로 저서를 계획했을 뿐 아니라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직접 원고를 쓰기도 했다. 1956년(단기 4289년)에 간행된 599쪽의 방대한 이 한국독립운동사는 사단법인 애국동지원호회의 문일민(文一民) 대표가 발행인이다. 이 책은 1965년과 1983년 한국독립사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943쪽이나 되는<한국독립사>로 보완 출간되었다.

이 저서에서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부터 1945년 광복까지 60년의 역사를 다루었다. 편집위원 등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은 이 저서의 편찬에 중요한 역할을 이학수(운허 스님)가 담당하였다. 이 저서의 증보 수정판으로 1965년과 1983년에 나온 <한국독립사>의 독립운동가 열전의 ‘이학수’에서 “한국독립운동사의 편찬회 편집국장으로 제1집을 완성하였다”고 했으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이선근 문교부 장관은 이 저서의 찬사에서, “사단법인 애국동지원호회가 김승학(金承學), 안재환(安載煥), 이석호(李石虎), 홍주(洪疇), 채수반(蔡洙般), 이학수(李學洙), 신백우(申伯雨), 유승훈(劉承勳) 등 제위의 종합 집필로 된 <한국독립운동사>를 간행하게 된다고 하니…”에서 중요한 집필과 편집진임을 알 수 있었다.

근대 한국사 역사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명저로 꼽히는 <한국독립운동사>는 운허스님이 주도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집필했다. 지금까지 단순 참여자로 알려진 이 책의 주 공헌자가 운허스님으로 밝혀짐에 따라 역경가, 독립운동가로서 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로서 운허스님의 면목도 새롭게 밝혀지게 됐다. 사진은 운허스님의 독립운동사 육필원고. 사진제공=신용철 교수

이 저서의 출간을 이미 전쟁 전부터 준비했지만, 1952년 부산 피난 이후, 4년에 걸친 노력으로 이루어졌는데, 1954년 7월까지 원고를 마감하고 같은 해 11월까지 교정하여 12월말 교정된 원고를 취사선택하여 확정하였다.

본서의 기사는 1919년 3ㆍ1운동까지는 백암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기본으로 하였고, 그 이후는 본서의 편찬위원장인 김승학이 1920년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신문 주판으로부터 수집한 자료를 중심으로 내외운동자들의 구술과 통보 등의 여러 자료를 이용하였다.

책의 제목인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는 당시 국회의장이며 서예의 대가인 해공 신익희 선생의 글씨로 아주 시원하고 훌륭하다. 저서의 앞에는 대통령과 부통령 및 대법원장의 휘호가 들어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압록강과 두만강(이남의 한반도를)을 용맹으로 진력하여 완전히 다시 찾는다(鴨綠豆滿唾手完還)” 고 힘차게 썼다.

부통령 함태영(咸台永)은 “선열들의 나라 위한 충성스러운 영혼들을 위로하고, 민족 광복의 정신을 격려하며, 여러 현명한 분들의 공정한 역사서술을 거쳐, 가히 후세의 귀감을 기술하였다”고 치하하였다. 김병로(金炳魯) 대법원장은 “삶을 버리고 정의를 취하며, 나라를 부유하고 강성하게 하며, 이름을 천추에 빛내, 공을 만대에 이루었다”는 휘호로 한국독립운동사 간행을 축하하였다.

제1편은 ‘국내운동’, 2편은 ‘만주운동’, 3편은 ‘해외운동’, 4편은 ‘독립운동가 약전’, 5편은 ‘순국(殉國) 인사록’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역사적 자료를 수집제공하면서 시비를 논하거나 비평을 가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의 약전에는 당시 생존한 사람들은 넣지 않았다. 그래서 이학수 역시 운동의 기사에서만 나올 뿐, 약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과 불교에 귀의한 후에도 항상 조국의 독립, 해방 후에는 교육입국 및 역경사업으로 치열한 애국 및 수행의 길을 걸은 스님을 우리는 잘 안다. 그리고 이 항일구국의 투쟁을 역사로서 기록한 부지런하고 시대의 사명감을 통감한 역사가로서 공헌한 스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의 생존자로서 봉선사에서부터 서로 가까운 스님의 독립운동가 김성숙(金星淑)이나 대동청년당을 함께 한 신백우 및 독립군 사령관 이청천(李靑天, 본명 池大亨) 등을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원고용지’ 란 붉은 글씨가 선명한 붉은 선의 원고지에 만년필로 기술하였다. 이 육필 원고를 보면서 나라와 민족을 평생 사랑한 스님의 뜨거운 마음을 읽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하다. 

[불교신문3076호/2015년1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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