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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웅 시인의 달 여행]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1. 라벤더가 가득 피어 있는 달

이 글을 읽는 그대

최초의 기억은

언제이고 무엇인가?

   
수도원 앞마당에 라벤더가 가득 피었다. 금발의 여인이 꽃밭 속에 들어가 한참 그 꽃을 바라보고 있다. 코를 가까이 대고 향을 맡다가 명상에라도 든 듯, 아니면 무슨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또다시 우두커니 서서 보라색 라벤더 꽃을 내려다본다.

오래된 중세 수도원과 반바지 차림으로 선글라스를 낀 여인, 그리고 보라색 라벤더가 각자 자신만의 강한 개성을 지니면서도 서로 묘하게 어울렸다. 나도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짙은 라벤더 향에 잊혔던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일까.

‘향기의 여왕’, ‘성모 마리아의 식물’이라고도 불리는 라벤더는 뇌에 작용하여 두통을 멈추게 하고 불면증을 없애고 심신을 편안하게 해준다. 햇빛이 굳게 잠긴 꽃봉오리를 천천히 열듯이 우리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던 존재의 까마득한 기억을 열어주는 열쇠 중 하나가 향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안데스 산맥의 어느 깊은 산속에 있는 인디오 마을에 전생을 기억나게 해주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나무에 꽃이 절정으로 피었을 때 그 향기를 맡으면 자신의 전생이 모두 떠오른단다. 꼭 한 번. 하지만 한 번 맡은 향기에 마비되어 다시 향기를 맡아도 전생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는 꽃나무.

그런 적이 있다. 산동네 단칸방에서 자취를 하던 서른 살 언저리 무렵. 늦여름, 어느 일요일 저녁이었던 것 같다. 반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방바닥을 지나 벽을 통과해 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으로 후드득 바람이 한 줌 들어왔는데 함께 묻혀온 것이 깻잎 향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뒷마당에 잔뜩 심어놓았던 그 깻잎 향기가 내 코끝으로 지나가던 순간, 갑자기 어떤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주 어렸을 적 참깨를 터는 할머니 등에 업혀 바라봤던 앞산과 노을, 커다란 드럼통 속에서 타오르는 장작의 열기로 끓던 우거짓국 냄새, 심지어 그때 할머니가 하시던 말까지 떠오른 것이었다.

최초의 기억이 몇 살 때니? 가끔 사람들을 만나면 물어본다. 이 글을 읽는 그대 최초의 기억은 언제이고 무엇인가? 할머니 등 뒤에 업혀 있을 나이라면 말문도 트이지 않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렸을 텐데, 할머니가 털던 참깨 향이 뇌의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내 방 창문으로 들어온 강한 깻잎 향이 그때의 장면, 냄새, 말까지 일깨워준 것일까.

향기에 대한 기억은 비단 그것만이 아니다. 어느 책에도 길게 쓴 적이 있지만 동유럽의 알프스라 불리는 타트라 산맥 언저리에서 숙소를 얻어 자던 밤에도 그랬다. 침엽수로 가득 들어찬 뒷숲에서 흘러나오는, 소나무 향보다 강하고 깊은 향기에 마치 데자뷔 현상처럼 이곳이 아닌 언젠가 살았던 저곳의 생이 떠오른 적이 있었다.

향기에 대한 그런 기억 때문이었을까. 늘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전 세계 라벤더의 90퍼센트가 생산된다는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의 라벤더 마을이었다. 보라색 바다처럼 펼쳐지는 남프랑스의 라벤더 밭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남프랑스의 7월 더위를 뚫고 굳이 멀고 높은 라벤더 꽃밭까지 온 이유가 그것이었다. 친구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찾아온 라벤더 밭은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불리는 프로방스 뤼베롱의 산동네 마을 고르드(Gordes)에 있었다. 절벽 위 높은 요새인 고르드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1148년에 세워진 세낭크 수도원이 나온다. 돌로 쌓아놓은 엄숙하고도 육중해 보이는 수도원 앞으로 보랏빛 물결이 펼쳐진다.

산꼭대기 아래 능선을 따라 창문이 예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돌로 지은 집과 돌로 쌓아 만든 담벼락들 너머 저토록 아름다운 라벤더라니! 부조화가 아니라 부조리 같았다. 그 부조리가 이루어내는 낯선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징글맞았다.

거울이 아니더라도 오랜 바라봄은 결국 나를 비춘다… 나를 바라보게 해준다

금발의 프랑스 여인이 중세 수도원 앞 라벤더 꽃무리 한가운데에 들어가 생각에 빠져 있다. 보라색 물결에 무릎까지 빠뜨린 그녀의 백색 다리 살결은 햇빛이 닿을 때마다 보라색 물비늘처럼 반짝거렸다. 가슴이 뭉클해올 만큼 황홀했다.

전생이 떠오른 것일까. 그녀도. 중세에 이곳 고르드 산속으로 들어와 수도원을 짓고 라벤더를 재배하며 살던 젊은 수도사를 사랑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일까.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매일같이 돌담 위에서 몰래 바라보며 맡던 라벤더 향기가 기억난 것일까. 이 높은 산속 마을까지 혼자 찾아와 오랫동안 사색하는 그녀가 궁금했다.

세낭크 수도원은 점점 타락해가는 교회에 염증을 느낀 수도사들이 고르드 산속으로 들어와 돌로 수도원을 지으며 금기와 금욕의 생활을 시작한 뒤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봉쇄 수도원이다. 지금도 수도사들이 고립, 궁핍, 단순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지키며 묵언 수행을 하고 하루 십오 분만 말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곳 라벤더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런 배경과 풍경 때문이다. 오래된 중세의 돌벽 수도원, 봉쇄된 고립과 궁핍한 삶을 지향하는 수도사들이 키우는 라벤더. 보라색은 금기와 금욕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깨끗이 하다’는 뜻의 라틴어 Lavo에서 유래한 라벤더를 그래서 수도사들이 가꾸며 생활했다고 하지만, 사실 라벤더는 돌이 많은 이 지역에서 재배하기 적합한 식물이다.

라벤더는 건조한 모래땅과 척박한 돌들 사이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이 그러하듯이 환경과 상황이 척박하고 힘든 곳에서 자라나는 것일수록 그 꽃과 향기는 아름답다. 정신과 영혼에 그 무엇인가 유익한 것을 안겨준다. 사람도 그렇다.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만들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남은 이 생에서의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것은 곧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에 해당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는 궁극에는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와 합일되기도 한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물었다. 이 생에서 공부하고 만나고 깨우치며 쌓은 품성 말고 본래의 나라는 품성, 성격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무수한 경험과 마음공부로 쌓아온 품성은 이 몸이 없어지고 나면 어디로 가는가.

보라의 명상처럼 보라의 라벤더 속에서 그런 생각에 젖어 있다가 보라색 어둠이 짙어질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달이 떴다. 남프랑스의 달이나 서울의 달이나 중세의 달 역시 매양 마찬가지고 하나이고 같다. 그러나 다른 것은 우리가 살았던 곳이다. 당신이 살았던 시대에 바라보았던 달, 당신이 다음 생에도 이 세상에 와서 바라볼 달, 우리가 무언가 간절히 빌며 바라보던 달.

거울이 아니더라도 오랜 바라봄은 결국 나를 비춘다. 나를 바라보게 해준다. 라벤더 밭에서 한참 꽃을 바라보던 금발의 여인이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어떤 기억이 떠오른 것일까.

황량하고 딱딱한 돌들로 이루어진 저 달에 문득 라벤더 꽃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에서 라벤더 향기가 난다. 저 달 향이 비추는 전생을 우리는 매일 밤 꿈속에서 잠깐 보았다가 다시 까무룩 잊는 것인지도 모른다.

 

■ 권대웅 작가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양수리에서>로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 <당나귀의 꿈>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산문집 <살아가면서 깨달은 한 마디>, 장편동화 <돼지저금통 속의 부처님> 등이 있다. 달을 그리고 달시를 쓰는 시인으로 세간에 알려지며 몇 차례 달시화 전시를 열었다. 매일 오후6시 BBS불교방송 ‘권대웅 시인의 달에 쓰는 편지’ 문자 발송 진행 중이다.

[불교신문3073호/2015년1월14일자]

 

 

 

 

권대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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