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화엄사상과 생명평화사상으로 세상과 어울려온 도법스님은 올해 ‘붓다로 살자’라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스님은 개인 모두가 부처이므로 미래의 깨달음을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지 말고 오히려 각자의 맡은 바를 죽을힘을 다해 사는 것만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며 개인적인 수행에 머물러 마음의 힐링만을 추구하는 불교에서 중생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는 보살행을 역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붓다로 살자’는 타이틀과 그 내용을 전달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스님은 본래부처이기 때문에 특별한 수행을 통해 다시 붓다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하면 즉각 도둑놈이 되듯이 누구든 지금 당장 예수 행위, 붓다 행위를 하면 그가 바로 즉각 예수요, 붓다라고 한다. 깨달음, 해탈이 먼 훗날 도달해야 할 특별한 경지가 아니라 지금 당장 그대와 내가 본래 거룩한 붓다임을 알면 된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듣자면 도법스님이 말하는 부처는 옛 속담 속에서 “저 사람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야!”라고 할 때의 ‘어진사람’이거나 “저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고 할 때의 ‘착한사람’을 의미하는 거란 생각이 든다.

또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는 착한 행위가 당장 ‘부처의 행위’요 양보하는 그 마음이 즉각 ‘부처의 마음’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냥 “착하게 살자” 혹은 “보살로 살자”라면 될 것을 굳이 “붓다로 살자”라는 운동을 전개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붓다는 깨달은 분이므로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말을 하지만 그 설법을 중생에게 해야 하므로 중생이 사용하는 말도 한다. 붓다에게 천신이 깨달은 사람도 ‘나’라는 관념을 가지고 나라는 용어를 사용하느냐고 물었을 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천신] “번뇌가 다하여서 아라한 되고 마지막 몸을 받아 가진 비구가
‘나는 말을 한다’ 거나 ‘그들이 내게 말한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까?"

[세존] “번뇌가 다하여서 아라한 되고 마지막 몸을 가진 비구라 할지라도
‘나는 말을 한다’거나 ‘그들이 내게 말한다’고 말을 할 수 있네.
그 사람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잘 알아서 일상적인 어법으로
세상의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이네 " (S1:25)

존재의 속성을 꿰뚫어 보고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언어를 진제(보편적인 언어)라고 하고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세속제(차별적인 언어)라고 한다. 중생이란 존재의 보편적인 특징을 보지 못하고 차별성만을 보는 존재들이기에 ‘중생은 중생이고 부처는 부처다’라고 밖에 못 보는 한계를 지닌다.

그런데 붓다는 '중생이 본래부처다'라고 중생이나 부처의 공통된 속성을 보시고 차별이 없는 지점을 강조한다. '중생이 본래부처다'라는 설법을 듣고 우리는 믿음을 발하거나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하는 의문을 갖고 더욱 탐구하려는 마음을 내게 된다. 그러므로 ‘본래부처’는 우리에게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원리와 가능성’을 뜻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본래부처’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대승에서는 ‘사자의 비유’로 설명한다. 사자 새끼 한 마리가 어렸을 때 길을 잃고, 양의 젖을 먹고 성장하게 되었는데 그 사자는 자신이 양 인줄로만 알고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리나 늑대 등에게 쫓겨서 도망 다니기가 일쑤였는데 어느정도 성장한 어느 날, 기지개를 펴고 한번 크게 고함을 질러 보았다. 그랬더니 여태까지 그토록 무서워했던 이리나 늑대들이 자기를 두려워하고 멀리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때 사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내가 사자구나!’ 그후로는 어떤 동물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고 도망가는 일도 없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사자의 새끼가 그 자신이 아무리 사자가 아니라고 해도 사자이듯이 우리들 스스로가 부처가 아니라고 부정할지라도 우리가 부처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어린 사자가 양의 젖을 먹고 자란다는 설정과 어느 정도 커서야 사자후를 하게 된다는 설정은 스스로가 사자인 것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 스스로 부처인 것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착각, 고정관념, 자만, 열등감, 자아관념등 우리의 부정적인 마음들일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을 없애고 바로잡는 것을 안목의 변화, 수행, 참선이라 부른다. 초기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팔정도를 실천하여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결국 “붓다로 살자”라는 주장은 “팔정도를 실천하자”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대승불교는 팔정도로 표현되는 불교가 자리적인 면으로 기울자 소승불교라고 비판하고 육바라밀을 내세워 “보살로 살자”는 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보살로 살자”는 운동은 수행과 생활을 하나로 묶어내고 ‘깨달음 병’에 허덕이는 수행자들에게 활로를 열어주었다.

“보살로 살자”는 운동은 아래로는 “어질고 착하게 살자” “매사에 최선을 다하자”라는 것을 포함하고 위로는 문수보살 같은 대지혜와 관세음보살 같은 대자비를 포함한다. 그것은 보살이 의미하는 범위가 초발심을 낸 중생과 깨달음을 이룬 수행자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붓다’라는 개념은 ‘보살’이라는 개념에 비해 한정적이다.

이런 한정적인 개념을 가지고 “붓다로 살자”고 하면 때때로 자신이 정말 붓다인가 의심하고, 자신의 행위가 붓다의 생각과 말에서 벗어났음을 번민하게 된다. 그 불안전성 때문에 다시 ‘죽을 힘을 다해서’라는 말로 포기하지 말 것을 독려하게 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 또는 “보살로 살자”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붓다로 살자’는 주장은 그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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