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수준 ‘높은 교양’을 바탕으로 ‘전문 기술’을 교육하는 기관이다. 현재 한국에서 운영되는 대학 제도는 서양의 근대가 동양으로 확산되면서 정착된 것으로, 유교적 봉건사회 지탱을 위해 관리를 양성하던 조선의 성균관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지역과 역사의 차이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역시 인재의 양성이라는 목적만은 변함이 없다. 물론 어떤 ‘인재’를 양성하는가에 대한 생각들은 달랐다. 봉건시대에는 관리가 핵심이었다면, 근현대가 시작되면서 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인재도 필요하게 되었다. 과학 기술자, 의료 기술자, 경영 기술자 등을 꼽을 수 있다.

소위 사회 각 방면의 ‘전문 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확장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핵심이 있다. 대학은 ‘높은 교양’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그 위에 ‘전문 기술’ 영역 인재를 교육하는 쪽으로 확산되었다.

사회에 큰 공을 세우는 사람들도 ‘배운자들’이고, 큰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도 ‘배운자들’이다. 때문에 인격이 안 된 인재를 양성하면, 그 해악의 범위와 파괴력은 막대하다. ‘땅콩 리턴’의 대한항공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배운 자들이 제대로 된 가치관이 없을 때, 그 배움은 독약으로 작용한다.

대학의 사명과 이념을 잘 알고 있는 미국의 전통 있는 명문 대학들은 이미 ‘전문기술’은 ‘대학원’에서 교육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역시 ‘높은 교양’에 치중하고 있다. 직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전공은 ‘대학원’에서 교육한다. 우리나라의 대학들도 이미 이런 추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법관 양성을 위해 ‘로스쿨’을 만들고, 의사 양성을 위해 ‘의학대학원’을 운영하고, 경영인 양성을 위해서 ‘MBA과정’을 만든다. 학자는 ‘일반대학원’에서 양성한다.

‘대학’의 본질은 지성인이 갖추어야 될 ‘높은 교양’을 가르치는 일에 있다. 수학을 가르치고, 물리학을 가르치고, 화학을 가르치고, 철학을 가르치고, 역사를 가르치고, 문학을 가르친다. ‘전문 기술’은 전문대학원에 교육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근대화 내지는 현대화 속에서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속에서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잊어가고 있다. 이런 양상은 각 방면에서 나타난다. 대학의 총장을 모시는 기준도 예외는 아니다. ‘CEO 총장’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의 왜곡된 대학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대학이 ‘높은 교양’을 바탕으로 ‘전문 기술’을 교육하는 기관이듯이, 그곳의 최고 지도자는 우리 사회가 가야할 도덕적 비전을 제시하는 자이어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총장 휘하에 ‘전문기술’을 교육하는 각종 대학원장과 단위 기관장들을 배치해야 한다. 그곳은 교육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교육이 있고 나서 경영도 있다.

최근 동국대 총장을 보면 경영에는 성과가 있었지만 교육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역사가 100년이 넘는 대학에서 비(非)교수 출신 총장은 최근 동국대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현 총장의 재임 사퇴는 다른 명문대학이 지향하는 ‘교육 동국’을 위한 충정의 발로로 보여진다. 치열한 대학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난 4년 간 외형을 키우고 첨단학문을 도입해 학교 명성과 평가를 높인 것은 당시로서는 적절한 정책이었고 많은 성과를 거뒀다.

이제 전임 총장이 닦은 바탕 위에서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동국대가 ‘대학’으로 발돋움하도록 ‘교육 총장’이 나와야한다. 그리고 그 총장은 ‘높은 교양’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비전은 인권이다. 불교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을 제시하는 마루 되는 가르침이다. 진정한 ‘종교(宗敎)’이다.

[불교신문3068호/2014년12월20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