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상 교수, 불교사회연구소 세미나서 주장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국가에서나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정치권이 종교계의 독자성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불교는 국가권력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중세 일본불교 종단 가운데 권력과 밀착해 발전을 도모한 교단도 있었지만, 국가권력에 정면으로 대항한 종파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법화경>을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으로 받들고, 불신자는 국왕이라 하더라도 시주공양을 받지도 베풀지도 말라는 일련종의 불수불시파(不受不施派)다.

원영상 원광대 교수는 지난 4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불교사회연구소(소장 법안 스님) 호국불교연구 2차 학술세미나를 통해 이같이 말했다.

불교사회연구소는 지난 4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한중일 불교와 국가를 주제로 제2차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일본 불교와 국가’라는 주제로 발제에 나선 원 교수는 “일본 고대 말부터 불교와 국가 관계에 있어 대교단들은 새의 양 날개와 같이 상보관계에 있었음을 주장했지만, 불수불시파는 불법위주의 주장을 함으로써 (정권과) 충돌했다”며 “무사정권이라는 냉혹한 현실에서도 교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원 교수에 따르면 도요토미가 권력을 행사하던 1595년 교토 방광사 대불을 건립하고 1000여 명의 스님에게 법회 참석을 명한다. 이에 일련종은 신앙전통을 고수하며 불참하는 불수불시파와 종문의 성장을 위해선 권력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수불시파로 양분된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가 권력을 장악한 1599년 불수불시파 대표들은 국가 권위에 대항한 대역죄인으로 규정, 쓰시마로 유배를 가게 된다. 1660년대에는 정권에 의해 불수불시파의 최대 법난이 일어났으며 지하조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원 교수는 밝혔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비합법화의 길은 피해갈 수 없었다. 신분이 적발되면 다른 종파로의 개종을 압박받거나 기독교인들과 같이 처형당하기도 했다.

원 교수는 “1876년 불수불시파가 메이지 정부에 공인을 받을 때 2~3만의 신자가 있었다. 이는 탄압 하에도 숨어서 신앙을 지킨 일정한 신자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며 “현재 일본 내에서 교세는 미약한 수준이지만 오늘날 이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고 밝혔다.

원 교수는 마지막으로 일련종계 내 재가중심의 신종교적 성향을 띠는 분파들을 소개했다. 20세기 이후 창가학회를 비롯해 영우회, 입정교성회 등이 등장했다. 원 교수는 이 가운데 일본 사회와 정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창가학회에 주목했다.

원 교수는 “재가중심의 일련종계가 어느 종단보다도 정치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의미를 갖게 한다”면서 “특히 창가학회의 공명당(公明黨)은 불법민주주의를 내걸고 현실적으로 정치계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불교가 불법의 가르침을 정치적 이념으로 전환시킨 예는 현대에 와서 창가학회가 처음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이병욱 고려대 박사는 ‘중국의 불교와 국가’를 주제로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교단과 국가의 관계, 수당시대와 송원시대, 명청시대의 불교정책 등 중국불교교단과 국가의 관계를 통시적으로 고찰했다. 또 윤기엽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한국 불교와 국가’에 대해 발표했다.

[불교신문3066호/2014년12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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