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망명정부’ 북인도 다람살라서 열린 ‘2014 달라이라마 한국인 법회’ 현장

 

법회장에 들어서기 전, 전세계서 몰려온 불자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덕담을 건네면서 환대하는 달라이라마(가운데).

우리는 법(法)을 ‘다르마’라고 한다. 협의적 의미로써 법은 인과를 인정하고 인과를 인정한 가운데 고통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과 도(道)를 말한다.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요인을 깨우쳐야 하는데, 고통은 대개 마음을 제어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한다. 광의적 의미로써 법은 종교를 말한다. 어떤 대상을 신앙하는 것이다. 인류는 수천년간 많은 종교를 신봉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묻고 싶다. 21세기 현재 우리에게 과연 종교는 필요한가.

18세기부터 21세기 현재까지 과학과 기계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해왔다. 21세기는 기계문명의 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역시 과학의 발전을 누리고 있다. 이는 색성향미촉, 즉 우리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그러나 몸처럼 마음에도 풍요를 가져왔는가. 능력자와 재벌이 넘쳐나지만 마음의 부자를 찾아보긴 힘들다. 한국에 자살률이 얼마인가.

과연 돈이 없어서 자살하는 것일까. 현대인들이 자살하는 원인은 마음의 불행 때문이다. 마음의 불행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온다. 불안과 두려움은 인간관계의 불신에서 생긴다. 불신은 경쟁심과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불안감이 가중되면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달라이라마 주석 남걀사원서

12년째 열리는 ‘한국인 법회’

200여 한국인에 수천명 에워싸

중관보만론 교재…韓英 동시통역

한국인 불자 의식한 달라이라마

한국의 자살률, 교육체계 지적

마음수행 통한 空ㆍ지혜 깨치길…

최근 들어 라다크에도 전에 없는 자살사례가 발생했다. 물질의 풍요와 발전 뒤에 ‘결핍’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안할 때는 어떤 종교든지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창조주에게 위로를 받기도 한다. 신앙심은 불안을 해소해준다. 21세기 현재 종교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모든 종교의 지향점은 사랑과 자비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인간’임을 간과해선 안된다. 피부색과 인종, 국적, 정치적 이념이 달라도 같은 인간임을 먼저 유념해야 한다. 종교적 이유로 다른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인식부족의 결과다.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자비와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마음의 평화가 있을 때 육체적 건강이 온다. 원한과 화가 넘치면 육체적 문제가 야기돼 면역체계가 저하되기 마련이다. 사랑과 자비를 가지면 우리 몸 역시 행복하다. 우리 몸이 행복하면 가정과 사회, 국가와 지구 전체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올해 여든살 달라이라마의 법문은 여전히 유쾌했고 열정적이었다. 부처님 가르침을 엄숙하고 신중하게 설명하면서도 때로는 흥미로운 소잿거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사진제공 가연숙

현대 교육체계에는 정신적인 마음의 행복보다 물질적 풍요를 지향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종교만이 ‘자비’를 말한다. 한국의 교육체계에서도 돈버는 방법이 교육내용의 핵심이다. 마음의 행복에 관한 가르침을 교육에 담지 못하고 있다. ‘세속적 윤리’만을 가르친다. 사랑과 자비의 종자, 사랑과 자비의 씨앗이 존재함을 깨우치고 그것을 개발하고 함양시키는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다.

창조주를 인정하는 종교도 존중받아야 한다. 창조주의 신망을 토대로 한 사랑과 자비, 인욕과 용서의 마음이 인류에 도움을 주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자이나교, 불교 등의 사상은 이른바 ‘무아’(無我)다. 아트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무아’는 나와 남 자타의 개념에서 내가 없는 것이 아니다.

불교 외 모든 종교는 불멸의 내가 있다는 것에 착안한다. 반야경에서 ‘오온개공’은 자성이 없다, 오온이 공하다는 뜻이다. 일체개공의 의미다. 일반적으로 ‘오온이 공하다’라고 번역하지만, 티베트에서는 ‘오온조차도 공하다’라고 말한다. 일체 제법이 무아임을 말하는 것이다.

인연ㆍ조건으로 이름 붙여진 존재

아집서 생긴 무더기…‘거짓종자’

날마다 신구의 통해 무수한 업

실상에 대한 존재방식이 ‘지혜’

용수보살이 설한 ‘무아의 지견’

바른 실상 여실히 아는 완전한 앎

아집 아소집 여의고 해탈 이뤄

‘번뇌장’을 끊으려면 우선 ‘공(空)’을 깨우쳐야 한다. 또한 내게 있어 해탈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보리와 해탈, 궁극적 깨달음을 절실히 원하고 이에 대한 원리와 이치를 알아야만 해탈을 희구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보리심과 공사상은 수행에서 가장 요긴한 덕목이다. 이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천신이나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몸’이 필요하다. 결국 삼보는 해탈을 구하는 자의 귀의처이다.

부처님이 성불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부처님이 성불한 목적은 오로지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해서다. 부처님은 자신이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적정에 머무르지 않고 중생의 이익을 도모하셨다. 지혜와 방편을 통해 일체종지 궁극의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은 부처님 말씀을 통해서 가능하다.

용수보살 중론에는 자비심으로 인해 모든 견해를 끊기 위해 정법을 설한다는 의미가 실려 있다. 바른 견해와 지혜를 일으키기 위해서 10만배 기도를 한다고 치자. 이것은 악업을 정화하고 복을 쌓는 데 도움은 된다. 지혜를 일으키려면 공성의 앎을 터득해야 한다. 법집을 통해 무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1000여명에 달하는 티베트 스님들 역시 달라이라마를 자주 친견하지는 못한다. 법문에 집중하는 티베트 스님들.

공성의 지혜와 전도된 지견은 상반된 이치다. 이 둘은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인식이다. 전도된 지견이나 잘못된 인식, 즉 법집과 무명을 없애려 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공사상이다. <반야경>에서 제법이 무자성이다, 실체가 없다고 거듭 말씀한 이유다. 용수보살이 이런 연유로 자비심으로 인해 중생의 그릇된 견해를 끊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아시아 대부분 국가에선 조상 대대로 불교를 신봉해왔다. 나는 불자들에게 ‘21세기의 불자’가 되어야 한다고 늘상 말한다. 지구상 모든 종교에는 교조들이 존재하는데 ‘연기(緣起)’를 말하는 이는 없다. 부처님만이 연기사상을 말했다.

불교를 제대로 알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불교를 신앙한다면 21세기에 어울리는 불자다. 불교도들이 말로는 ‘자비’라고 하면서 갈등와 마찰만 빚는다면, 손으로는 옴마니반메훔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기심으로 ‘우리편’ ‘우리절’이라며 서로 싸운다면 결국 불교에 불명예를 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받들어 신심을 일으키려면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불교 전체를 파악해야 한다. 필요에 의해 개별적 수행을 한다고 해도, 부처님 가르침의 보편적인 부분을 잘 파악해야 한다. 나의 스승이 가르침을 준다고 해도 스승이 어떤 사람인지 우선 알아야지, 스승이 말했다는 이유로 무조건 치우치면 균형잡힌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지식, 교학, 정진 등 세가지가 스승이 갖춰야할 덕목이다.

지금부터는 해탈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아집’이라는 것에 물들어 있는 동안에는 궁극적 행복을 맛볼 수 없다. 아집을 소멸했을 때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통증을 느낄 때 진통제를 먹음으로 잠시 통증을 잊는다해도 진통제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근원을 뿌리째 뽑았을 때 완전한 편안함을 느낀다.

‘번뇌’라는 병은 무엇으로 치유되는가. 공성의 지혜를 통해서다. 계정혜 삼학의 수행, 그 가운데 계학이 굳건할수록 삼매를 이룰 수 있다. 정념과 기억의 힘으로 어떤 대상에 지속적으로 집중함으로써 삼매를 이어갈 수 있다. 잠깐의 삼매는 동물도 이룰 수 있다.

불교 뿐만아니라 인도 외도들도 선정삼매수행을 말하고 가톨릭에도 삼매에 관한 수행이 있다고 들었다. 고대 그리스에도 이후에 맥이 끊어졌을 뿐 삼매와 유사한 종교가 있었다. 이어 정학, 즉 혜학 지혜를 일깨우는 수행이 필요하다. 지혜는 실상 대상에 대한 존재방식을 말한다.

용수보살은 ‘무아의 지견’을 지혜라고 말한다. 미묘하고 심오한 경지다. 무아의 지견은 대상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어서 부정의 인식으로 ‘아니다’ 혹은 ‘없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공성의 인식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달라이라마가 공성을 하도 강조하니까 공성에 귀의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웃음)

무아라면 내가 현재에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도 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며 어리석은 이들은 이와같이 두려워하지만 현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있고 나의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참된 의미가 전도된 것, 그런 까닭에 바른 실상을 여실히 아는 완전한 앎으로 아집과 아소집이 생기지 않는다.

공성이란 우리 눈에 보이는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다시말해 실체가 없다는 것이지 ‘없다’는 부정이 아니다. 양자물리학자들이 물질의 실체를 규명했을 때 ‘실체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어떻게 존재한다고 말하는가’라는 의문에서 딜레마에 빠진다.

모든 존재는 이름에 의해서 존재하고 이름 붙인 것에 의해서 존재할 뿐이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적인 부분만을 다룰 뿐 의식과 마음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한다. 그래서 공이라는 개념, 눈으로 보고 경험하고 있는 것에 실체가 없다고 말하는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 역시 공성을 완전하게 깨닫지 못했다. 공성을 거의 깨달아가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여러가지 조건과 인연에 의해서 이름붙여진 것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력이 있다고 믿는다. 대상에 실체가 있다고 보는 집착과 탐진이 떨어지면 번뇌가 완전하게 사라진다. 공성이란 말을 들으면 나는 언제나 환희심이 밀려온다.

부처님은 아집을 타파하기 위해 무아를 설하셨다. 무아를 통해 바른 실상을 여실히 알아야 한다. 아집과 아소집이 생기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아집에서 생긴 무더기(오온)들을 나로 여기는(아집) 그것은 실제로 거짓이다. 거짓종자로 생긴것의 발생이 어찌 진실일 수 있겠는가. 무더기가 진실하지 않음을 봄으로써 아집이 끊어지고 아집들을 끊고 난 후에는 고통의 무더기가 생기지 않는다.

오온에 집착하면 아집이 생기고 아집이 있으면 업이 생긴다. 아집이 있는 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루에도 우리는 신구의를 통해 다양한 업을 짓는 무명으로 인해 다시 윤회하게끔 하는 무수한 업을 100번 1000번 짓는다. 12연기는 계속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생로사가 발생하기 전 12연기 일련의 단계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자성은 우리분별에 의해 조건적으로 발생해서 잠시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성이 없다. 과거 현재 미래의 어떠한 상황에도 자성 실체를 얻지 못하기에, 조건에 의해 존재하고 조건에 의해 명명할 뿐, 개념에 의해서 존재할 뿐이다. 해탈이란 것은 무엇인가. 번뇌를 끊은 상태다.

천당에 가거나 정토에 태어나는 것이 해탈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는 허물들이 모두 다해서 허물에서 완전하게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해탈 역시 실체가 없다. 실상을 앎으로서 유무의 극단이 적멸된 까닭에 악업과 복덕을 넘어서며 그것으로 악도와 선취를 벗어난 그것이 해탈임을 부처님께서 설했다.

인간은 흙(地)이 아니고 물(水)도 아니며, 불(火)도 아니고 바람(風)도 아니다. 허공(空)도 아니도 식(識)도 아니니 이 모든 것이 아니라면 그것과는 별개로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지수화풍공식이 모인 까닭에 진실된 것이 아니듯이 그와 같은 요소 하나하나도 집합체인 까닭에 진실된 것이 아니다. 형상(色)의 물체는 이름뿐인 까닭에 허공 또한 이름뿐, 원소가 없는데 색이 어디에 있는가. 고로 오직 이름뿐인 것이다.

조바심 내지 말고 세세생생 수행한다 생각하라. 몇년 안에 성불한다는 것은 공산당 이념과 같이 극단적일 뿐이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정진하길 바란다.(금강승 보살계 염송하며 법문 마침)

사진과 서적을 들고 있는 불자들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직접 사인을 하는 여유를 보였다. 사진제공 가연숙

■ 한국인 법회 이모저모

법문 2시간 경과, 화장실 다녀오라 언급

쉬는시간 법상에 그대로 사람들과 ‘눈팅’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여든살 달라이라마는 여전히 유쾌했고, 활력이 넘쳤다. 매일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 지친 기색 없이 열정적인 언설로 사흘 잇따라 거침없는 법문을 설했다.

법문 2시간여가 지나면 “화장실이 급하면 법문이 잘 들리지 않는 법”이라며 화장실을 다녀오라고 직접 언급하는가하면, 15분 쉬는 시간동안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며 돌아다녀도, 법상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앉아있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법당에 사람들이 다 채워질 즈음엔 두 팔을 머리위에 둥글게 말아올려 ‘하트’모양을 선보이며 천진한 웃음을 선보이기도 했다. 법회는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법회 중간중간 어린 티베트 스님들이 따끈한 짜이와 밀가루빵을 나눠줬다. 영어로도 동시통역해서 여타 외국인들에게도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달라이라마의 처소에서 남걀사원 대법당으로 들어갈 때도 달라이라마는 멀리서 온듯한 불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는가하면, 자신의 저서를 들고 있는 서양인들에겐 책을 받아 정성껏 사인을 해주는 여유를 보였다. 법회에서도 예정에 없었는데 반야경 진언게 게송을 읊어주는가하면, 보살계 수계의식을 올리기도 했다.

오전법문 1시간여 앞두고는 전세계서 찾아오는 친견객들의 예방을 받는 일정이 빼곡하다.

법당 인근에서는 법회기간 내내 동국대 경주캠퍼스 대외협력처가 주관한 의료봉사가 펼쳐졌다. 다람살라에 살고 있는 1000여명의 불자들이 의료혜택을 받았다. 법회 마지막날 저녁에는 달라이라마가 설립한 티베트예술대학에서 재학생들이 선보이는 티베트의식무 공연을 관람했다.

여수 석천사 신도를 비롯해서 우리나라 불자 200여명이 실크로드여행사를 통해 다람살라에 입성했다.

■ 한국인 불자가 묻고 달라이라마가 답하다

“잠이 많아서 수행에 방해”

“나는 날마다 8시간 숙면”

-부처님 가르침 실천수행하기 정말 힘들다.

“신심을 갖고 지혜를 체득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희구심이다. 끊임없이 사유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수행에 있어 수면이 방해가 된다면.

“수행을 할 때 음식만큼 수면도 중요하다. 숙면을 취해야 몸을 제대로 영위할 수 있다. 다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관건이다. 나는 대단한 수행자는 아니지만 하루 8시간 잠을 잔다. 스님들은 나이트클럽을 갈 일이 없어서 되도록 일찍 잔다.(웃음)”

-마음이 힘들어 갈수록 부정적으로 변하는 친구에게 도움주고 싶다.

“어떤 원인으로 마음이 힘든지 원인파악을 한 뒤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불안이나 두려움과 같은 마음 속 문제 혹은 나쁜 이기심과 강한 집착이 보통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티베트 현지인들의 집집마다 달라이라마 사진이 걸려 있다.

“현재 티베트 라싸에 있는 공직자들이 나에게 존경을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중국측에서 저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내가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수행을 해도 분노하고 타인을 비난할 때가 많다.

“수행을 했다고 괄목할만한 큰 변화를 맞기란 힘들다. 나 역시 60년 70년 공성과 보리심으로 수행했지만, 조금씩 변화를 이뤄냈을 뿐이다.”

[불교신문3060호/2014년11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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