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본연을

이해하기까지

중국 현실에 맞춰진

특별한 형태의 불교

즉 격의불교는

계속됐다

 

중국 불교는 역사상 네 번의 폐불 사건을 겪었다. 최초이자 가장 큰 사건은 북위의 태무제(太武帝, 424~452)때 일어났는데, 약 6년에 걸쳐 불교가 탄압을 받았다. 당시 종교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도교의 도사들이 황제를 부추긴 원인도 있었지만, 이상만을 추구했던 불교계에도 책임이 있었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된 후, 불교 본연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진 상당한 세월이 걸렸다. 400년 무렵, 인도 원전에 대해 구마라집이 명료하게 번역해 내면서 이전의 모호하거나 난해했던 개념들이 정리되고, 그에 따라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에 내재된 본래의 뜻까지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됐다. 이를 본의(本義)불교라고 한다. 50여 개의 민족으로 이뤄진 광대한 영역의 중국에서 불교는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과 지역에 따라 본의의 성격에서 벗어난 불교 형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구마라집 이후 체계화된 불교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사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유가나 도가적인 분위기 속에 살고 있던 중국 사람들은 매우 생소한 종교로 여겼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 성장해 효도하고 결혼을 통해 자식을 낳음으로써 가문을 지속시키는 것이 가장 큰 도리라고 여겼던 사람들에게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출가해 승려가 된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도 불교가 중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구체적인 사후(死後) 세계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왔던 초기의 인도 전법승(傳法僧)들은 붓다의 이상적 가르침과 중국의 유가적·도가적 현실 속에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현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고, 상황에 맞게 붓다의 가르침을 펼쳐 나가야만 했다. 붓다의 난해한 가르침을 유가나 도가적인 용어를 빌어서 설명했고, 생사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무덤 등에 붓다의 모습을 조용히 새겨 넣기도 했다. 불교의 본연을 이해하기까지 이러한 중국 현실에 맞춰진 특별한 형태의 불교, 즉 격의(格義)불교는 계속됐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특별전 ‘동양(東洋)을 수집하다’를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불비상(佛碑像)’이다. 비석에 불상이 새겨진 이들 불비상은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북위부터 당나라 때까지 조성됐다. 고대 중국에서 비석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고 생각했던 유가나 도가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라 윗부분은 둥글게, 아랫부분은 네모나게 만들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유가적인 관념이 사회를 지배했던 서기 전후의 한(漢)나라 때에 비석은 특히 발달했고, 비석의 크기는 곧 효의 크기와 비례한다고 여겼다.

불비상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효성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기 위해 전 재산을 바쳐 만들었던 비석에다가 붓다의 모습과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새겨 넣은 것이다. 물론 비석 본연의 기능인 비문과 함께 말이다. 유교 그릇을 빌려다가 그 속에 붓다의 가르침을 담은 것이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들 불비상을 관람하면서 우리가 사는 지금, 진정 어떤 그릇이 붓다의 가르침을 담기에 적절한가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불교신문3061호/2014년11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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