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봉정암에 처음 오른 때를 기억해본다. 생생하다. 그 감동이 지금도 내 안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 이후 두 번 더 봉정암에 올랐는데, 첫 기억이 가장 생생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의미를 두는 것과 같다. ‘처음’의 기억은 각인되듯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봉정암 기도는 꼭 성취된다’ ‘봉정암은 오르기 무척 어렵다’ ‘봉정암은 인연이 닿아야 갈 수 있다’ ‘봉정암은 평생 3번은 가야한다’ ‘봉정암에 한 달에 한 번씩 오르는 사람도 있다’ 는 등 봉정암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오매불망 봉정암에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직장이 있고, 아이들 3명이 커가고 있어서 1박2일 오롯이 봉정암 등반을 위해 시간을 내기 어려웠던 때였다.

그 해 가을이 시작될 무렵, 능인선원 불교대학 기별 순례에 봉정암이 올라왔다. 무작정 신청했다. 내가 속한 기수였으나, 활동을 못하는 상태라서 약간 낯선 분들이었지만, 그 어색함이 내 발원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봉정암을 가보고 싶다는 발원이 가득한 때와 인연이 닿았나보다. 버스 한 대가 출발했고, 나처럼 몇몇은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부처님 안에서 모두 쉽게 마음을 열었다. 이래서 도반은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봉정암 순례를 신청할 때부터 마음은 벌써 봉정암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 멋진 백담사를 3배만 하고 지나쳤고, 국수를 보시해주는 영시암도 빠르게 건너뛰었다. 그리고 5시간여의 긴 산행. 몸은 지쳐갔지만 마음은 계속 설레는 상태였다. 깔딱고개를 기어오르고, 사자바위를 지나자 나무사이로 봉정암이 보일 것 같아 고개를 기웃거리며 걸었다. 문득 독경소리가 들렸다. 독경소리에 느려졌던 다리가 절로 힘이 솟아 빨라졌다.

드디어 봉정암에 도착했다. 바로 108배를 해야 몸이 풀린다는 도반들의 권유대로 법당으로 갔다. 기대했던 것보다 작은 법당이었다. 법흥사처럼 불단에 부처님이 모셔져있지 않은 법당이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향한 불단은 금판만 있었다.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도반과 함께 천천히 108배를 했다. 그리고 도반들을 따라 사리탑으로 올라갔다. 아! 그 첫 만남의 기억이, 전율이 다시 느껴진다. 용아장성을 거느리고, 대청봉의 호위를 받으며 설악암반을 기단으로 소박하게, 1300여 년을 그 자리에 있는 사리탑을 만나는 순간은 ‘아!’ 하는 감동의 한 마디 이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합장을 하고 서서 가만히 있었다.

사리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몇 봉지의 쌀이 있었고, 초와 미역도 있었고, 몇 마리의 다람쥐도 있었고, 이끼도 있었고, 설악의 바람도 있었고, 동해의 물빛도 있었다. 또 1300년의 세월도 있었다.

영화의 장면, 장면처럼 긴 세월을 느껴보았다. 동해의 물이 파도치고, 바람은 휘몰아쳐 가고,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청태처럼 끼었던 이끼도 검은 빛으로 변한 1300여년의 세월. 신라 자장율사의 마음을 느껴보았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뇌사리를 모시고 먼 길 와서,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설악산 전체를 기단으로 한 다섯 단의 탑을 조성하고, 마지막으로 연꽃봉오리 같은 원뿔형태의 보주를 얹고 합장을 할 때의 벅차오르는 마음. 이런 느낌들이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했다. “감사합니다. 부처님!” 그리고 생각했다. ‘이 뇌사리탑 앞에 나는 1300년 동안 몇 번이나 섰을까?’

[불교신문3061호/2014년11월26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