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불교신문 공동기획 <수덕사와 선학원>

 

암울한 일제시대에도

선맥 이은 수행도량

 

정혜사 능인선원과

한국최초 비구니선원인

견성암 제일선원 등

많은 선원 운영

 

안거 때마다 200여 명의

눈 푸른 운수납자 정진

수좌라면

누구나 오고 싶어 해

 

 

선학원 설립의 주축이 된 덕숭총림 수덕사는 ‘한국 근대 선불교 중흥도량’이다. 수덕사는 한국불교의 명맥이 희미해지던 구한말, 선불교를 중흥시킨 경허스님을 필두로 만공스님-혜암스님-벽초스님-원담스님-설정스님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잇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왜색화된 불교를 극복하고 한국불교 전통을 잇기 위해 설립된 선학원 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 반포로 인해 수덕사는 마곡사 말사로 편입됐다가 1962년 통합종단 출범 후 조계종 제7교구본사로 승격했다. 1984년 11월에는 덕숭총림으로 다시 승격돼 초대 방장에 혜암스님이 추대됐다. 1996년에는 수덕사 승가대학을 개원해 학인 스님들이 청강과 강론에 진력하고 있다. 수덕사는 예산과 서산, 홍성, 태안, 당진 등지를 중심으로 총 78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700여 명의 재적 스님들이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수행과 포교를 위해 진력하고 있다.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스님은 전국 각 사찰을 다니며 선원을 잇따라 개원해 눈 푸른 납자들의 안목을 열었다. 스님의 제자로는 혜월(慧月)스님, 수월(水月)스님, 만공(滿空)스님, 한암(漢岩)스님 등이 있다. 경허스님은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불교의 쇠퇴기에 혜성처럼 나타나 무애자재한 법력으로 선풍을 일으켜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다. 스님은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말 쓰러져 가는 선불교를 일으킨 경허스님과 선학원을 설립한 만공스님의 선수행 가풍을 올곧게 이어 오고 있는 덕숭총림 수덕사 전경.

특히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스님은 스승인 경허스님의 선지를 계승해 선풍을 진작시켜 나갔다. 만공스님은 덕숭산에 금선대를 짓고 수년 동안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들을 제접하며 수덕사와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지도하며 선풍을 드날렸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선학원을 설립하고 초대이사장을 역임하고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선우공제회운동도 펼쳤다. 만공스님의 일제에 대한 저항일화는 유명하다.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서 미나미 조선총독이 “데라우치 전 총독이 조선불교에 끼친 공이 크다”고 말하자 “데라우치는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승려를 본받아 파계하도록 하였으니 큰 죄인이다. 마땅히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며 총독부 종교정책의 정곡을 찌른 호령을 했다고 전한다.

덕숭총림 초대 방장 혜암현문(慧庵玄門, 1884∼1985)스님은 1929년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을 받은 뒤에도 무섭도록 철저한 정진을 했던 선지식이다. 1943년 만공스님과 간월도로 가는 배 위에서 나눈 법담은 유명하다. 그 자리에서 만공스님은 혜암스님에게 “저 산이 가는가? 이 배가 가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혜암스님은 “산이 가는 것도 아니고 배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만공스님이 “그러면 무엇이 가는가”라고 묻자 손수건을 말없이 들어 보였다. 이에 만공은 ”자네 살림살이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라며 인가해 주었다고 한다. 혜암스님은 1956년 세수 72세 때 수덕사 조실로 추대돼 덕숭산에 주석하며 30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 전통선의 진수를 전하기 위해 1984년 10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국 서부 능인선원 봉불식에 참석해 한국불교를 미국에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제2대 방장 벽초경선(碧招鏡禪, 1899~1986)스님은 중창불사를 통해 수덕사를 오늘날의 대가람으로 일신시켰다. 1908년 13세 때 탁발 나온 만공스님에게 감화되어 부친과 함께 수덕사로 출가해 금강산 유점사와 오대산, 지리산 등지에서 수행했다. 잠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선농일여(禪農一如)사상은 세간에 큰 귀감이 됐다. 또한 제자들에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이 공부라고 강조한 스님은 1배 이상의 절을 사양하면서 말로 가르치기 보다는 행(行)으로써 제자들을 가르쳐 ‘보현보살의 화신’이라 칭송받았다.

제3대 방장 원담진성(圓潭眞性, 1926~2008)스님은 사부대중을 대할 때 언제나 자애로운 미소로 천진함을 잃지 않았다고 해 ‘덕숭산 천진불’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선지식이다. 원담스님은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선풍을 계승해 현대의 선농일여(禪農一如) 가풍을 새롭게 진작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본 산케이신문 주최 국제 서예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서예가로서도 명망이 높았다.

제4대 방장 설정(雪靖, 1942~)스님은 제11대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에서 물러난 뒤 문경 봉암사와 정혜사 능인선원 등지에서 한철도 빠짐없이 방부를 들여 정진하는 등 이(理)와 사(事)를 두루 겸비했다. 지난 2009년 8월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으로 추대됐으며 2011년 11월 대종사 법계를 품수한 뒤 현재까지 운수납자들의 지남이 되고 있다. 

근대 선풍을 중흥시킨 도량인 정혜사 능인선원에서 만공스님(앞줄 가운데)을 비롯한 수행납자들이 기념촬영한 모습.

수덕사는 선지종찰인만큼 무엇보다 수행 정진을 강조하고 있다. 덕숭총림 수덕사에는 억불정책의 조선조와 암울한 일제강점기에도 선맥을 이어 경허ㆍ만공스님이란 근대 선풍의 중흥조를 배출시킨 선불교 기본도량 정혜사 능인선원이 있다. 뿐만 아니라 만공스님의 주관 하에 건립된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 제일선원을 비롯해 비구니 납자들의 주요한 수행처인 보덕사 가야선원이 있다. 그 외에도 향천사 천불선원, 개심사 보현선원, 천장사 염궁선원, 법륜사 제일선원 등 여느 교구본사보다 많은 선원을 운영하고 있다.

안거 때마다 200여 명의 눈 푸른 운수납자가 정진하고 있는 덕숭총림 수덕사는 수좌라면 누구나 찾고 싶어 하는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도제 양성을 위해 해마다 만공스님 탄신일(음력 3월7일)과 열반일(음력 10월20일)에 맞춰 사찰 승가대학과 동국대, 중앙승가대 등지에서 수학중인 50여 명의 학인 스님들에게 만공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세계는 한 송이 꽃’(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이라고 일갈한 만공스님의 가르침을 이어 세계일화(世界一花)를 주창한 숭산스님은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앞장섰다. 전 세계에 포교당을 건립해 해외포교에 앞장섰던 숭산스님은 1987년 전세계 제자들에게 일상생활에서 불교수행을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펴며 ‘세계일화대회’를 열었다. 이후 올해 10회 대회까지 진행하고 있다. 숭산스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미국 예일대 출신의 대봉스님을 비롯해 많은 제자들이 세계 각지에 한국선불교를 전하고 있다.

덕숭총림 수덕사는 독특한 청백가풍과 전통을 잇고 있는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수덕사는 중생의 고(苦)의 원천인 상(相)을 경계하고 무상의 도를 지향하고 있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유형과 무형의 상을 떠나야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면면히 내려오기 때문이다. 수덕사 스님이 입적하면 연화대에서 다비를 한 뒤 사리는 수습을 하지 않는 전통도 이같은 이유에서 연유됐다.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만큼 수덕사에서 사리를 봉안해 놓은 부도를 찾기가 힘들다.

원융산림도 수덕사가 총림으로서의 사격을 이어가는 가풍 가운데 하나다. 청정승가의 표본인 원융산림을 실현함으로써 대중 갈등을 해소하고 승속을 뛰어넘어 화합할 수 있다. 주지는 물론 중앙종회의원 선출도 선거 없이 대중의 뜻을 모아 원융무애하게 결정하고 있다. 선거제도가 민주적 절차임에도 비승가적인 각종 병폐를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상(相)을 경계하는 수덕사의 가풍이 반영된 것이다.

대중화합을 위해 수덕사만의 통알(通謁)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해마다 설날이면 덕숭산에서 정진 중인 대중 스님들이 정혜사에 모여 수덕사 대웅전까지 1시간여 동안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내려와 통알을 한 뒤 윷놀이를 하며 대중화합을 도모하고 있다. 안거 때마다 해제에 앞서 수좌들이 덕숭산 일대를 청소하는 환경정화운동도 수덕사의 전통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수덕사는 선농일여(禪農一如)의 정신을 계승하며 일(노동)에 대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행하고 있다. 벽초스님과 원담스님 등 역대 방장 스님들이 앞장서 논밭을 개간하는 등 선농일여의 가르침을 몸소 전했으며 지금도 채소 등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공양물은 자체 생산해 소비하고 있다.

수덕사 주지 지운스님은 “선지종찰답게 불자들에게도 참선 정진을 강조하고 있는 수덕사는 철야참선정진과 템플스테이 등을 통해 참선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불교신문3047호/2014년10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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