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불교이야기(18) 진주 다솔사와 등신불

소설가 김동리(1913~1995)는 스물넷 꽃청춘시절 사천 다솔사에서 살았다. 1935년 소설 ‘화랑의 후예’로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듬해 다솔사에 짐을 풀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조용한 산사에서 창작에 전념하기 위한 문인들의 로망이 사찰이었으리라.

다솔사에서 머물다 해인사 재무소임을 맡은 주지 스님 따라 김동리도 잠시 해인사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지만 1937년부터 3년간은 다솔사에 눌러 앉았다. 그동안 사하촌 원전마을에 광명학원이라는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야학에서 농촌계몽운동만 했느냐, 당연히 연애도 했다. 당시 진주여고를 나와 함양의 모 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마을처녀와 사랑을 나눴다. 절에서 먹고자는 처지였지만 여자친구 가족의 요청으로 천주교 영세를 받았고 천주교 공소에서 혼배의식까지 올렸다.

김동리의 세례명은 ‘가브리엘’. 지금도 진주 옥봉천주교회에는 김동리의 영세서류가 보관되어 있다. 예나지금이나 불심깊은 남성들이 연인에 이끌려 타종교로 떠넘어가는 경우가 숱할진대, 김동리 역시 작품으로 보나 사상으로 보나 불자임이 분명하지만 적(籍)은 천주교에 있다.

사천 다솔사 적멸보궁.

김동리는 고희를 맞은 1982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소설 ‘등신불’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교과서에도 실린 마당에 영예로운 작품이라서 더 애정이 갔는지 모른다. 동리가 ‘등신불’을 쓰게 된 동기는 다솔사에서 만난 만해 한용운스님과 인연에서 비롯된다. 김동리의 육성이다.

“1937년 가을인가, 38년 봄인가. 그 무렵 만해 한용운씨가 다솔사에 왔을 때의 일이다. 나는 다솔사에서 10리 남짓 떨어진 원전(院田)이란 곳에서 광명학원에서 선생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연락을 받고 다솔사로 달려갔던 것이다.…차를 마실 때 만해가 무슨 이야기 끝에 ‘우리나라 승려 중에서 분신공양한 분이 있소?’하고 물었다….”

‘분신공양’ ‘소신공양’이란 말의 뜻과 의미를 그 자리에서 처음 들었던 김동리는 당시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오죽했으면 “아래턱이 달달달 떨려서 견딜 수 없었다”고 표현했을까. 그는 “나는 일찍부터 충격받은 이야기는 작품으로 멍을 푸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랄까”라며 ‘등신불’의 집필배경을 언급했었다.

중국 정원사라는 사찰 금불각에 안치된 등신불을 접한 ‘나’가 불상에 인간적인 고뇌와 슬픔이 서려있음을 이해하면서 전개되는 소설 ‘등신불’은 만적스님의 소신공양을 소재로 인간 본연의 세계를 그려냈다. 벌겋게 달아오른 향로를 머리에 쓰고, 가부좌 자세로 앉아 소신공양을 하는 수좌를 인간정신의 극치로 여긴 듯하다.

김동리는 자신의 제2의 고향이자 영혼의 안식처, 문학의 산실인 다솔사에서 자신마저 생애 최고의 작품이라고 자랑삼아 말한 소설 ‘등신불’을 집필하고 20여년만에 세상에 내놓았다.

[불교신문3042호/2014년9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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