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선지사 원천스님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선지리에 위치한 선지사(仙地寺)는 ‘신선이 머무는 사찰’이란 뜻이다. 우리나라 3대 명당 중 한 곳이 김해에 있다고 전하는데 그 곳이 선지사로 여겨진다. ‘학이 구름을 타고 나래를 펼치고 내려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운학산(雲鶴山)으로 불리는 선지사 뒷산과 선지사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이곳에는 장차 도인(道人)이 여러 명 배출될 것이라고 풍수지리가들은 예언하고 있다. 이처럼 뛰어난 기운이 서린 사찰이지만 원래 선지사는 사찰 격조차 갖추지 못했었다. 하지만 1986년 선지사(당시 덕천사) 주지로 원천스님이 부임해 반듯한 전통사찰 격을 갖추고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로 가꾸어 놓아 지역민과 소통하는 도량이 됐다.

주지와 수행납자의 삶을 살면서 선지사를 전통사찰 격을 갖춘 문화재보유 사찰로 가꾼 원천스님이 영산전 앞에 섰다.

 

 

40여년 전국선원서 안거

전강 성철 경봉스님 회상서

공부하며 포교ㆍ복지에도 정성

 

폐사 위기 시골 절 일궈

문화재 보유 사찰 만들고

‘종교화합 예수상’도 모셔

 

사찰주변 주거지역 변모 대비

‘미래 부처님’ 위한

불교유치원 건립에 만전

“원래 이 도량은 은사(운하)스님께서 1950년대에 일구신 도량이었습니다. 도량이라고 하지만 반듯한 부처님조차 모시지 못했어요. 쌀 한 됫박 부처님 전에 올려놓고 20여명의 불자들을 위해 축원할 정도였어요. 콩나물 사먹기 조차 어려운 절 살림이었지요. 아무도 맡고 싶지 않는 사찰에 들어와 30여 년 동안 도량을 일구었어요.”

지금은 사찰 앞에 공업단지가 펼쳐져 있지만 원천스님이 부임했을 때는 전형적인 농촌사찰이었다. 빗물이 줄줄 새는 사찰에 물받이를 하고 요사채와 약사전, 산신각을 신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스님의 불사에 대한 기도원력은 하나하나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결실을 맺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서울에 사셨던 대원경 보살을 비롯한 불자들이 불사에 도움을 주셨어요. 그분이 작고하자 따님도 모친의 불심을 이어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명색이 사자상승을 했다고 하지만 현재의 선지사가 있기까지는 우려곡절도 많았다. 사찰이 어려워 부채에 시달렸고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부처님 도량을 일궈야겠다는 기도의 힘이 지금의 선지사를 일궈냈다. 폐사 위기에 처한 사찰을 문화재를 보유한 전통사찰로 만든 과정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공장부지로 넘어갈 위기도 있었어요.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과 신도님들에게 사찰터에는 사찰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며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사찰을 구해 놓고 1994년 반듯한 요사채를 신축한 후 계속 불사를 해서 현재의 선지사가 있게 되었어요.”

원천스님은 이후 사찰 역사찾기에 나섰다. 1999년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에 선지사 발굴을 의뢰했다. “그때 ‘선지사(仙地寺)’가 새겨진 명문기와와 와편 등 30여점의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어요. 유물에 대한 학술고증을 해 보니 통일신라 때 사찰이 건립되었고, 고려를 거쳐 조선 중엽까지도 존재했다는 사실이 나왔어요. 아마도 당시에는 지금 앞에 보이는 마을까지 사찰경내지였던 대찰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역사성을 가진 도량임을 안 원천스님은 큰 법당을 건립하기로 마음먹었다. 보통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건립하는 게 상식이지만 스님은 영산전을 건립하고 그 안에 오백나한상을 조성하기로 했다.

“‘불모(佛母)’ 임영규 거사가 혼자 1년6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나한상을 조성했어요. 우리지역이 가야불교와 인연이 있으니 장유화상도 조성하고 원효스님, 의상스님, 서산대사도 모셨어요.” 선지사 영산전에는 심지어 ‘예수보살’까지 조성해 모셨다. 한국불교 최초로 사찰에 예수상을 모신 것이다. 당시로는 상당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은 종교 간의 화합과 소통을 위해 예수상도 사찰에 모실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불교계나 개신교계에서는 반대여론도 많았다. 그래서 스님은 단순하게 예수상을 법당에 조성한 게 아니라 중국에서 모신 사례를 찾았다.

“어느 잡지를 보니 중국 곤명 공죽사에서 1250년 전에 예수보살을 모셔놓았다고 했어요. 역사적인 근거를 찾은 셈입니다. 그래서 종교 간의 화합도 도모할 겸 해서 예수보살을 모신 겁니다. 21세기는 다종교 사회잖아요. 누구나 사찰에 와서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리자는 취지였지요,”

처음에는 반목과 질시가 있을 것 같아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불교에 배타적인 광신적 이교도들이 사찰방화를 많이 하던 터라 경계도 많이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상을 모신 취지가 알려지면서 차츰 경계심도 풀어졌다.

2001년에 영산전 불사를 회향해 전통사찰 사격을 갖춘 선지사는 부산 해조암에서 모셔온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 대한 감정을 의뢰해 조선시대 목불상으로 판명 받아 2003년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33호로 지정받는 경사도 맞았다. 영산전 불사 회향과 함께 ‘덕천사’라는 사찰이름도 ‘선지사’로 바꿨다.

사찰불사를 일단락 지은 원천스님은 이듬해인 2002년부터 수행납자의 길을 선택했다. “사찰 주지로 있으면서 하안거와 동안거 때면 선방에 들어갔습니다. 사찰 주지는 6개월 이상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데 종단법을 어겨가면서 선방을 다닌 셈입니다. 사찰 주지와 수행납자로서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힘들었지만 10년 넘게 두 가지 일을 병행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방에서 일념정진한 끝에 원천스님은 몇 년 전 불국사 선방에서 안거를 마친 어느 날 문득 다음과 게송이 나왔다고 했다.

“삼십오년납선객(三十五年納禪客)/ 남북동서를 자주 왔다갔다했구나(南北東西往來頻)// 그림자 없는 나무에 꽃이 만발하니(無影樹中花發開)/ 주린 즉 밥을 먹고 곤한 즉 잠을 잔다(飢卽食兮困卽睡).”

젊은 수좌시절 원천스님은 전국의 많은 선원을 다니며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배웠다.

“진주 법보선원에서 수행할 때는 전강스님 회상에서 공부했어요. 그때 스님은 매일 소참법문을 10여분씩 해 주시며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가다듬어 주셨어요. 해인사 성철스님 회상에서는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잡고 치열하게 공부했지요.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 회상에서는 ‘사람으로 왔으면 멋진 연극을 한번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곤 했습니다. 이러한 선지식들의 가르침이 지금까지 수행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 셈입니다.” 

선지사 큰법당인 영산전의 예수상. 종교화합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수행납자와 사찰불사를 번갈아 하고 있는 원천스님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출가시절 속가 모친이 해 준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스님 되는 것은 좋은데 어정쩡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중도 소도 아니면 하지 마라’고 하셨어요. 이 말씀을 평생 마음속에 새기며 올바른 수행자의 길을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올 하안거를 통도사 서운암에서 회향한 원천스님은 선지사로 내려와 지역포교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몇 년 후가 되면 이 지역은 공장지대에서 주거지역으로 바뀔 계획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지사가 해야 할 일이 많아집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사찰 아래에 유치원 부지를 확보해 놓았어요. 곧 유치원 불사를 진행해 미래 동량을 키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린이 포교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원천스님은 통도사 포교국장을 역임하며 다양한 포교방법을 모색한 전문가이기도 하다. 머지않아 선지사 앞은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고 그 앞에 원천스님의 반듯한 불교유치원이 들어설 것이다. 그 안에서 ‘미래 부처님’이 마음껏 뛰노는 모습이 그려진다.

원천스님은 …

 

1969년 운하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원천(元泉)스님은 1971년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73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해인사 봉암사 동화사 불국사 법주사 송광사 화엄사 상원사 통도사 등의 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해인사승가대학과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통도사 교무ㆍ포교ㆍ총무국장을 역임했다. 1986년에 김해 선지사 주지로 부임해 요사채와 약사전 산신각을 신축하고 1999년에 목조오백나한상을 조성해 봉안했다. 선지사를 전통사찰로 조성하기 위해 발굴조사 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 와당과 ‘선지사’ 명문기와를 발견해 선지사(과거 덕천사)로 사찰명을 개명했다. 2003년에는 선지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복장물 4점이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533호로 지정됐다. 사회복지법인 공창사회복지관장을 역임한 스님은 현재 선지사 주지이면서 김해 서부경찰서 경승실장으로 지역포교에 앞장서고 있다.

[불교신문3041호/2014년9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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