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석천사와 유림 충민사를 가다

충민사유물전시관에 조각상

참으로 모질다. 임진년에 몰려온 왜적은 7년만에 쫓겨났다. 전쟁의 상처는 고스란히 조선땅에 남았다. 국토는 황폐됐고, 한반도 인구의 70%가 무참히 희생됐다. 무엇보다 전쟁의 공포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임금 선조는 백미 600석을 내려 수륙재를 지내게 했다.

전쟁의 트라우마 치료는 불.보살님 몫이었다. 전국 사찰에서 천도재를 봉행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하면서도 확실한 치료제였다.
그 가운데 여수 마래산 석천사(石泉寺)는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승수군을 기리는 사찰이다.

석천사 전경.

마래산 중턱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있고, 바위아래 옹달샘이 있다. 여수앞바다로 흐르는 모정천의 발원지이다. 평소 충무공은 이 석천을 주로 찾았다. 좌수영이 있는 진남관에서 걸어서 족히 30분 거리이다. 산길을 걷고, 석천수를 마시며 작전을 구상했던 것이다. 

충민사 뒤에 있는 석천-충무공이 전라우수영에서이곳까지 산책하며 석천의 석간수를 마셨다.

1598년, 충무공이 전사하자 의병으로 참전한 향교 교리 박대복이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지었다. 충무공의 체취가 남아있는 마래산 석천수 앞이다. 3년 후, 이항복이 시찰차 이곳에 들렸다가 초라한 모습을 안타깝게 여겨 사당을 다시 세웠다. 또다시 3년 후, 선조는 사당이름과 현판을 보냈다. 충무공 사당 가운데 제1호 사액사당인 충민사(忠愍祠)이다. 아산 현충사보다 무려 103년 전 일이다.

전쟁이 끝나고 충무공과 생사를 같이했던 의승수군장 옥형스님이 충민사 옆에 토굴을 짓고 매일 향을 살랐다. 오늘의 석천사이다.
옥형스님은 80 평생을 석천사에 머물며 충민사에서 충무공과 의승수군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충무공 영정이 모셔진 충민사

....(상략)... 바다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옥형스님의 꿈에 이공이 나타나니 어찌 이공의 영이 잠들었다 하겠는가. 그는 갔으나 그의 애국충정은 죽지 않았음이다. 뒤에 군민들이 옥형스님의 의리를 사모하여 재물을 내어 암자를 중창하고 승도들을 수호케 했으니 절이름을 석천이라 하고 옥형스님의 영정이 동쪽 벽에 모셔져 있음도 법사의 감응이라 하겠다.
<1902년 여수읍지>

석천사(좌)와 충민사(우)

이처럼 석천사와 충민사는 한 몸이다. 여수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충민사가 사당이 아닌 사찰로 알고 있다. 임란이후 300여년간 석천사 주지스님은 충민사수호승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충민사의 모든 행사를 주관해 왔다.

석천사 주지 진옥스님은 “석천사와 충민사는 불교 사찰과 유림 사당이 전우애를 바탕으로 절친되어 400년을 이어오고 있다”며 “역사를 거울삼아 화합과 소통으로 미래를 준비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스님은 수륙재 복원을 주장한다. 임란의 마무리는 사찰에서 봉행한 수륙재가 했다. 특히 여수 흥국사를 중심으로 해남 대흥사와 미황사, 통영 미래사, 부산 범어사 등 남쪽해안가 사찰들은 해마다 수륙재를 봉행했다. 수륙재를 통해 전쟁의 공포를 씻어내고 미래를 준비했던 것이다.

석천사 의승당 앞에 서있는 진옥스님

진옥스님은 의승각 건립을 준비중이다. 충무공과 생사를 같이한 자운, 옥형대사와 승수군을 재조명하고 뜻을 계승하기 위해서이다.

석천사를 뒤로하면서 의승당 주련을 되새겨본다.

옥형 자운 두 큰스님 삼백여 의승군 / 임진 정유 왜란에 온중생 허덕일제
연꽃잡은 손으로 호국의 기치들어 / 왜인의 침략야욕 파사현정하셨네
충무공 순국하여 호국의 용되시고/ 의승군 대승의 얼 등불되어 빛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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