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깨쳤다는 분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에

유머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독단적인 판별기준이지만

깨우친 분이 존재한다면

최소한 유머감각만큼은

뛰어나리라고 믿는다

 

20여 년 전 목사님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공부하던 시절 얘기다. 목사님 중 한분이 도인 한 분을 모시고 올 터이니 함께 말씀을 들어보자고 했다. 자신이 사는 강원도 일대의 많은 목사님들도 그 분의 가르침을 듣고 도에 대한 안목이 크게 열렸다는 것이다. 모두들 호기심이 동해서 지인들에게 서로 연락을 해 서울의 모 장소에 모였다. 깊은 산에서 10년 동안 토굴을 파고 홀로 살며 도를 닦았다는 그는 자신이 깨달은 우주의 원리를 설명한 책을 벌써 두 권이나 써서 출판했다고 했다.

열강이 끝나고 다 함께 큰 식당을 빌려 늦은 저녁식사를 하였다. 마침 도인께서 내 옆 자리에 앉는 바람에 나는 그의 이어지는 강의를 또 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심드렁한 나의 태도가 그를 화나게 했는지 그는 자신이 분명 진리를 깨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인정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도인의 목청은 점점 커지고 설명도 길어져 나는 결국 항복한다는 표시로 허리 굽혀 절을 하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상하게도 그 사건을 시작으로 도를 깨쳤다고 주장하는 분을 여기저기서 많이 만나게 되었다.

이런 걸 두고 도인복이 있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하기야 구원을 받았고 한 술 더 떠 남들까지 구원받게 해 주겠다는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사실은 진리를 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다. 이런 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 같이 심각한 얼굴에 유머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깨우친 분이 만약 정말로 존재한다면 최소한 유머감각만큼은 뛰어나리라고 믿는다. 비록 평범한 장삼이사에 불과한 나만의 독단적인 판별 기준이긴 하지만 유머감각 하나로도 충분히 깨우친 분을 알아볼 수 있다고 본다.

영국의 헨리 8세 치하에서 왕의 친구인 토마스 모어는 왕의 총애를 받으며 수상직책을 겸한 대법관의 직책에 올랐다. 인생의 최고 절정기에서 그는 왕의 권위에 도전했고 사형을 언도 받았다. 헨리왕의 이혼과 결혼, 그것을 위해 제정한 수장령과 왕위 계승법, 그 결과인 로마교황청과의 결별, 이 모든 것에 반대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신앙양심이기도 했다. 그는 단두대에 올라 자신의 긴 수염이 칼날에 잘리지 않게 머리를 쑥 내밀었다. “내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며. 그는 사후 로마 가톨릭 성인으로 추대됐다. 생을 하직하는 마지막 자리에서 그가 날린 유머는 그가 성인이었음을 확실히 증거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해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현대 가톨릭의 틀을 만든 교황 요한 23세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어떤 짓궂은 사람이 여러 사람이 모인 파티석상에서 그에게 젊은 여성의 누드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걸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지체 없이 “혹시 부인이신가요?”라고 되물었다. 그의 높은 영성과 놀라운 유머감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번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도 그런 경지가 느껴진다.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는 방문기념으로 교황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큰 방명록을 내밀었다. 교황은 방명록에 돋보기를 써야 보일 정도의 작은 글씨로 사인을 했다. 주교들은 사인을 보고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강우일 주교는 “자신도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알 글씨로 암시했던 것 같다”고 했다.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유머이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주교님들도 옷깃을 여미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진리를 유머로 전달할 줄 알아야 진짜 깨우친 사람일 것 같다. 이런 지도자를 모신 가톨릭교회가 솔직히 부럽다. 교황은 이미 세상을 크게 바꾸어 놓고 있는 중이다.

[불교신문3036호/2014년8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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