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아미타부처님 봉안

 

 

 

서산 부석사가 올해 조성한 ‘마애아미타부처님’의 자애로운 모습으로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기도처가 되고 있다.

왜구들이 약탈해 간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 보며

오래도록 모실 수 있는

마애부처님 조성 원력 세워

올해 높이 4.5m 규모로 완공

8월 9일 점안법회 봉행

부석사주지 주경스님은 “과거 기록을 보면 부석사에 불·보살상이나 성보들이 많이 모셔져 있었는데 제가 주지로 왔을 때는 거의 도난당해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도록 모실 수 있는 불보살님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서 신도님들과 논의해 마애부처님을 모시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논의가 시작된 시점은 지난해 초부터였다. 일반인들은 오래된 불상을 그저 가치있는 문화재 정도로 생각했지만 부석사 신도를 비롯한 불자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인 성보(聖寶)였다. 주지 주경스님은 당시 심정을 불교신문 칼럼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난 1월말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 모셔져 있던 우리 서산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님이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급히 뉴스를 검색해보니 문화재 절도범들에 의해 몰래 반입이 되었고 불상은 문화재청에서 보관한다고 하였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1999년 처음 부석사 주지를 맡으면서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불상이다. 전임 주지스님께서 주지 인수인계 당시에 96년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 다녀오신 이야기와 불상을 돌려달라고 했던 경험을 전해주셨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꼭 다시 부석사로 모셔 오도록 하라는 간곡한 당부가 있었다.”

당시 사건을 계기로 스님은 부석사가 모시고 있던 성보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들을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1932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하여 관보에 게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부석사에는 4점의 불상과 불화, 범종 등 10여점의 성보들이 소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두 도난 또는 분실되고 몇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부석사에 영원히 모실 수 있는 부처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부석사에는 부처님을 조성할 좋은 자연석 바위가 있었고 서쪽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미타부처님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바위 모양으로 봐서 석불입상이 좋겠다는 의견도 모아졌다. 이렇게 해서 산신각 아래 우측 자연석 바위에 높이 4.5m, 폭 1.5m 규모의 마애아미타부처님을 조성하기로 결정됐다.
주지스님이 먼저 불사금을 내놓고, 사찰 신도들의 십시일반으로 불사금이 모연됐고, 여러 장인들의 작품을 비교해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88석재(구 연화석예)대표로 있는 김대연(55, 석공예 문화재기능 보유자) 조각가에게 부처님조성 불사를 맡겼다.

김대연 조각가는 “마애부처님의 상호는 고풍을 살려 투박하면서도 엄숙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며 “자연석에 그대로 조각하는 마애불이기 때문이 완전하게 균형을 맞추기보다는 불자들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가기 위해 몸집을 조금 크게 조성했다”고 밝혔다.

도비산 자연석에 아로새겨진 마애아미타부처님은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며 겉은 부드러운 석질을 간직하고 있지만 바위 내부는 강한 석질을 가지고 있어 세세생생 영원히 불자들과 함께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해서 조성된 부석사 마애아미타부처님은 이번 부처님오신날 즈음에 그 모습을 불자들에게 선보였다. 그러자 사찰 불자들은 물론 지역에서 기도객이 발길을 잇고 있어 부석사 최고의 명소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아직 점안을 하지 않은 마애부처님이지만 그 자애로운 모습에 감동받은 불자들의 기도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부석사는 마애아미타부처님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점안법회를 오는 8월9일로 정했다. 백중 회향일 바로 전날 토요일로 정해 덕숭총림방장 설정큰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셨다.
부석사주지 주경스님은 “소납이 부임한 지 15년째 되던 해에 의미 있는 불사를 회향하게 되어 기쁜 마음”이라며 “마애아미타부처님 조성을 계기로 부석사를 찾는 불자들의 발길이 많아지고 지역불교가 활성화 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지역민에게 기쁨과 이익 주는 사찰되겠다”

인터뷰 / 부석사주지 주경스님

“부석사 주변에는 석불이 많습니다. 백제시대부터 조성된 부처님들인데 서산마애삼존불, 태안마애삼존불 등 국보와 보물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런 지역에 과거에 장엄했던 불보살님을 우리사찰도 현대에 한번 조성해 기도의 힘을 얻어 보자고 원을 세웠습니다.”

오는 8월9일 ‘부석사 마애아미타부처님 점안법회’를 봉행하는 서산 부석사주지 주경스님<사진>. 스님이 마애부처님을 조성한 인연에는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 들어온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이 부석사에 봉안돼 있었던 성보였지만 돌아오지 못한 아픔이 있었다. 과거 많은 성보들이 부석사에 봉안돼 있었지만 도난이나 유실돼 현재는 부석사 일원만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점이 안타까워 부석사와 함께 세세생생 영원할 수 있는 마애부처님을 조성하기로 신도들과 뜻을 모았다.

“처음 부석사에 부임했을 때 전각은 겨우 3채밖에 없었어요. 본사 어른스님들도 소납을 주지로 보내면서 ‘절이 어려우니 가서 도량수호 잘 하라’고 당부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렇게 1999년 7월에 부석사에 부임한 스님은 4개월동안 사찰청소를 한 뒤 11월에 취임식을 가졌다. 그때 왔던 도반스님들은 너무나 궁벽한 절살림을 걱정해 줄 정도였다.

“한달 내내 있어도 신도가 거의 오지 않았어요. 전임 주지스님도 고시생을 받아 밥해 주고, 흑염소 키워 절살림을 했다고 할 정도로 절살림이 어렵다고 했어요.”
사찰이 노후 해 도배할 재정이 없어 아는 사람을 통해 은행에서 대출을 1000만원 받았는데 갚는데만 3년이 걸릴 정도였다. 그렇게 부석사주지 소임을 시작한 스님은 매년 절살림을 늘여갔고, 사찰을 찾는 신도들도 점차 늘어났다.

“2002년 산신각 불사하면서 신도들 신심도 늘었어요. 회향식에는 전 총무원장이셨던 법장스님(2005년 원적)이 증명법사로 모셨어요. 그 후로부터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다양한 포교 프로그램으로 부석사를 널리 알리는데 매진했어요.”

2003년부터 시작한 템플스테이에는 연인원 3000여명이 다녀갈 정도다. 템플스테이와 더불어 12년째 진행하고 있는 산사음악회도 지역의 유명한 문화행사다. 매달 발간하는 사보도 80호째 발간했고 108산사 순례기도도 71번째 다녀왔다.

“부석사 산사음악회는 서산에서 가장 오래 된 문화행사가 됐습니다. 그래서 서산 사람들은 절에 간다고 하면 의례 부석사를 가는 줄 안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제 부석사는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이 됐고, 전국에서도 알아 주는 템플스테이 도량이 됐다. 그 과정에서 사찰 건물도 늘어 10여 채가 된다.

“시골 사찰이지만 부석사에는 많은 소모임이 있습니다. 봉사모임인 선재회가 있고, 경전모임인 일선회가 있습니다. 또 사찰음식 연구모임인 공양청과 다도모임, 108산사순례 모임도 있습니다.”
부석사주지 소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종단일에 꾸준히 활동해 온 스님은 포교원 포교국장. 총무국장. 템플스테이 초대 사무국장. 총무원 기획실장, 서울 역삼청소년수련관장. 중앙종회의원 등의 직책을 수행해 왔다. 현재는 불교신문 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93년부터 불교잡지 <불광>에 연재를 하면서 틈틈이 모은 글과 불교방송, 불교텔레비전에서 방송한 글들을 엮어 <마음을 천천히 쓰는 법> 등 5권의 책을 저술했다.

주경스님은“ 처음 부임했을 때 서산사람들은 부석사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했는데 이제는 부석사를 모두가 잘 알고 지역 주민들은 사찰 입구에 나무도 심도 꽃도 심으며 가꾸기도 한다.”며 “앞으로도 지역민들에게 기쁨과 이익을 주는 부석사가 되도록 가꾸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서산부석사는…

신라고승 의상스님 창건

영주 부석사와 ‘쌍둥이 사찰’

근대 한국불교 중흥시킨

경허·만공스님 주석처 

한국불교 중흥조인 경허선사와 그의 제자 만공스님이 주석했던 부석사 전경. 아래는 경허선사가 썼다고 전해지는 심검당(尋劍堂) 현판이며 맨 아래는 만공스님이 70세에 쓴 부석사(浮石寺) 현판.

원효스님과 함께 신라의 대표적인 고승인 의상스님이 서기 677년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2005년 심검당 보수과정에서 나온 상량기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중국에 갔다 온 인연으로 부석사를 창건한 이래로”라고 기록돼 있다.

사찰 창건설화는 영주 부석사와 똑같아 ‘쌍둥이 사찰’로 불린다.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의상스님은 종남산 지장사에서 지엄스님으로부터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신세를 진 신도의 집에 들러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때 신도집의 딸인 선묘는 의상스님에게 청혼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상스님이 떠나자 의상스님을 연모한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이 몸 용이 되어 의상스님을 무사히 귀국하게 할 것이다’라고 발원했다.

무사히 신라에 귀국한 의상스님은 선묘의 넋을 천도하기 위해 절을 지을 명당을 찾아 나섰다가 근처 바닷가 의상스님의 발길이 멈춘 곳이 도비산(島飛山 - 마치 섬이 날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는 산)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백제가 멸망한 뒤 유민들의 민심이 흉흉하던 지역이라 반대가 많았다.

항상 의상스님을 따라 다녔던 선묘는 곧 의상스님의 뜻을 알아채고 허공중에 커다란 바위를 띄워 사람들을 물리친 뒤 바다에 그 돌을 띄워 놓으니 사람들이 스님과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의상스님은 도비산 중턱에 부석사를 세웠고 사찰 앞 바다에 떠 있는 돌을 부석(浮石) 혹은 ‘검은여’라고 불렀다. 이후 부석사는 무학대사가 중창을 했으며 한국불교의 중흥조였던 경허선사가 주석하며 선풍을 휘날렸고, 그의 제자 만공스님이 머문 호서지방의 명찰로 손꼽히고 있다.

 

[불교신문3030호/2014년7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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