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법게와 등등상속 8점 부산시문화재로

조계종 진제 종정예하가 7월26일 전법게 8점을 공개했다.

조계종 진제 종정예하가 향곡선사로 부터 받아 보관해오던 전법게 4점과 전법 내력을 쓴 상속문 4점 등 전법게 8점이 부산시 문화재로 등재된다.

문화재로 등재될 전법게는 경허선사가 혜월스님에게 준 전법게, 혜월스님이 운봉스님, 운봉스님이 향곡스님, 향곡스님이 진제스님에게 준 ‘전법게’와 전법게를 내릴 때 함께주는 ‘등등상속’ 4점이다.

이 전법게는 향곡스님에 1967년 하안거 해제법문 때  법거량을 통해 인가를 받은 진제스님에게 전법하면서 함께 준 것이다. 이 전법게를 접한 문화재청이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 문화재 등재를 권유해 이뤄졌다. 서류 절차가 끝나고 오는 가을 부산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될 예정이다. 또 석우스님이 보관해오던 숙종 때 만든 염송 10권과 불교교리 사전 격인 <제경법수> 한 권도 포함됐다.

진제 종정예하는 오늘(7월26일) 오후 부산 해운정사에서 기자들에게 전법게를 공개하고 “4대에 걸쳐 은사가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전법게가 내려오는 것은 희유한 일로 문화재 등재를 계기로 참선법이 더 널리 선양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전법게와 등등상속

전법게 4점 중 경허선사가 혜월스님에게 준 1점은 혜월스님의 손상좌 성공스님이 보관해오다 통도사에 기증함으로써 원본을 통도사가 소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3점은 진제 종정예하가 보관해오고 있다. 

 

눈밝은 스승이 눈푸른 제자 찾아 가일층 정진 당부
100년을 넘게 흘러온 자료 소중히 간직해 후대 전파

전등(傳燈)내력과 전법게 내용은....

스승 없이 깨달은 자는 천마외도(天魔外道)라고 할 만큼 선지식의 지도는 절대적이다. 대전에서 서울로 가야하는데 잘못된 지도로 부산으로 가면 만사 허사가 되는 것처럼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스승은 ‘진리의 고향으로 가는’ 바른 지도와 같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마하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전한 이래 달마, 육조 혜능 마조 백장 임제로 이어져 오던 눈밝은 선사들에 의해 수 천년간 부처님의 심인법이 살아온 것이다. 조선 500년을 거치며 전등의 맥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약해졌으니 이 또한 선지식의 부재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실날 같은 생명만 간신히 유지하던 선풍은 경허라는 위대한 인물을 만나 사해(四海)에 떨치게 되었다. 경허선사는 경전을 해석하는 강사나 염불로 천도에 주력하던 조선 말에 목숨을 건 화두 참구와 법거량을 통한 정법안장의 계승 등 고래로 내려오던 선 전통을 그대로 복원하고 여러 선사들에 의해 그 맥이 이어져 오늘날 한국선불교의 산맥을 형성했다.
경허의 법은 삼월(三月)로 불리는 수월 혜월 월면 만공스님을 비롯 한암스님 등에게 전해졌다. 사형인 수월스님은 북간도로 가 조선사람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며 오늘날 까지 만주의 한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큰 스승으로 남았다. 혜월스님은 남으로 가서 법을 펼쳤으며 사제인 만공이 경허의 본산인 덕숭산을 지키며 스승의 법을 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일러 수월은 상현달, 혜월은 하현달, 만공은 중천을 지키는 달이 되어 조선의 하늘에 떠올라 불교가 다시 일어났다며 칭송했다. 1862년 충남 덕산면에서 태어난 혜월스님은 정혜사에서 출가, 천장암에서 경허스님을 만나 글을 배우고 선법을 익혔다. 스승으로부터 화두를 받고 일념으로 정진하다, 짚신 한 켤레를 내려놓는 소리에 눈이 열려 경허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혜월이라는 법명과 함께 전법게를 받았다. 그 때가 29세이던 1890년이다. 

경허스님이 혜월스님에게 전해준 전법게 내용과 이를 설명하는 종정예하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 여시해법성 (如是解法性 ) 즉견노사나 (卽見盧舍那) 의세제도제창(依世諦倒提唱) 무문인청산각(無文印靑山脚 ) 일관이상도호 (一關以相塗糊)/ 일체법을 요달해 알 것 같으면 자성에는 있는바가 없는 것 이같이 불성을 깨쳐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세상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문자와 도장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겼으며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1908년 48세부터 남으로 내려간 혜월스님은 선산 도리사, 팔공산 파계사, 양산 통도사, 극락암, 범어사 등을 옮겨 다니며 후학을 지도하고 가는 곳 마다 산을 개간해 밭을 일구어 대중과 주민들을 먹여 살리니 사람들은 스님을 일러 ‘개간선사’(開墾禪師)라 불렀다. 혜월스님은 1935년 74세에 만공 한암스님과 함께 조선불교선종의 종정으로 선출됐다.

부산 선암사에서 혜월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운봉 성수(雲峰 性粹) 스님은 1889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백양사 운문암에서 깨달음을 얻고 선암사에 주석중이던 혜월스님을 찾아가 점검 받기를 청했다. 운봉스님이 혜월 스님에게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어느 곳에 안신입명(安心立命)하고 계십니까?” 물었으나 혜월 스님은 대답이 없었다. 이에 운봉이 혜월 스님을 한 대 치면서 “살아있는 용(活龍)이 어찌하여 썩은 물에 잠겨있습니까?” 하니 혜월 스님이 “그럼 너는 어찌하겠느냐?” 묻자 운봉이 불자를 들어 보였지만 혜월스님은 “아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운봉이 다시 “스님, 기러기가 창밖에 지나간 것을 모르십니까?”하니 혜월 스님은 그제서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속일 수는 없구나.” 그리고 혜월 스님은 운봉에게 전법게를 내렸다. 1925년 4월의 일이다.

향곡선사(가운데)와 진제스님(오른쪽 앞).

“일체의 유위법은 본래 진실된 모양이 없으니 저 모양 가운데 모양이 없으면 곧 이름하여 견성이라 함이라/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본무진실상(本無眞實相) 어상약무상(於相義無相) 즉명위견성(卽名爲見性)“
1912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난 향곡스님은 16세에 천성산 내원사에 입산, 20세에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雲峯)스님에게 구족계를 수지했다. 1930년 내원사 조실로 있던 운봉스님 회상에서 정진하다 활연대오(豁然大悟)한 후 인가를 받고 전법게를 받았다. 1941년의 일이다.
“서쪽에서 전래 된 문인(文印) 없는 인장은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나니 만약 전하고 받을 수 없는 것 조차 여의면 까마귀는 날고 토끼는 달리느니라/서래무문인(西來無文印) 무전역무수(無傳亦無受) 약리무전수(若離無傳受) 오토부동행(烏兎不同行) “
향곡스님은 1947년 성철스님등과 함께 한국불교에 새로운 가풍을 불러일으킨 ‘봉암사 결사’를 주도했으며 정화 불사를 주도하고 묘관음사에 길상선원(吉祥禪院)을 세워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었다. 또 선학원 이사장과 중앙선원 조실,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로 후학을 제접했다.

석우스님을 은사로 1954년 해인사에서 출가한 진제스님은 1967년 향곡선사로부터 법을 인가 받았다. 인가 당시 이런 법거량이 오고갔다.
“부처님의 눈과 지혜의 눈은 묻지 아니하거니와 납승의 눈은 어떤 것입니까?” “사고원래여인주(師姑元來女人做)니라”(나이 많은 비구니는 원래 여자가 한다는 뜻) “금일에야 선사님을 바로 보았습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봤느냐?” “관(關)!” “옳고 옳다!”
1967년 향곡선사는 진제스님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렸다.
“불조대활구(佛祖大活句) 무전역무수(無傳亦無受) 금부활구시(今付活句時) 수방임자재(收放任自在)/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 지금 그대에게 활구법을 부촉하노니 거두거나 놓거나 그대 뜻에 맡기노라.”

은사인 석우선사와 향곡선사의 선법을 이어 평생을 불교정법의 당간을 곧추 세우기위해 일관해온 진제스님은 해운정사에서 국제무차선대회를 개최한 것을 비롯 종정에 추대된 뒤 미국을 방문해 수많은 종교인과 철학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간화선법을 소개하고 최근에는 영문 법어집을 출간하는 등 한국선의 국제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4대에 걸친 전법게의 문화재 등재 추진도 간화선의 대중화 생활화를 위한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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