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선생님!

처음 뵈었던 1981년 봄, 관악캠퍼스는 두런거리는 공포와 학생들 보다 더 많은 전경들의 앳된 피로감으로 가득했습니다. 광주민주화 운동의 핏빛 희생을 깔고 야차보다 더 무서운 눈빛으로 국민들 앞에 군림하던 군부 정권이 강의실까지도 서슴없이 드나들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교육학 개론’ 담당 교수로 대형 강의실에 들어오셨습니다.

정규 교과목에는 심드렁하고 ‘철학연구회(철연)’라 불리는 이념 동아리 공부를 진짜 공부라고 생각하고 있던 저와 친구들이 처음부터 선생님 강의를 열심히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교육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을 각각의 강점을 중심으로 열변을 토하시듯 강의하시는 모습이 처음에는 낯설고 특이하다는 느낌까지 가졌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비판적 교육학 이론을 포함해서 매주 그렇게 강의하시면서 그 관점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저희들 몫임을 누누이 강조하시는 모습을 뵈며 저희들은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강의가 진행될 때마다 다른 단과대학 친구들의 정말 좋은 강의이고 교수님이라는 평이 늘어갔고, 그런 교수님이 사범대학 교수님이라는 사실에 으쓱해지기도 했습니다. 공부를 계속해서 대학에 자리잡은 지도 어느 새 20여년을 헤아리게 되면서 그 어지러운 시절에 흔들림 없이 자신의 전공을 가르치신 선생님의 여여함이 얼마나 간직하기 어려운 것인지 절감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청년 시절부터 해 오신 불교 공부의 이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특별한 인연 때문입니다.

군부 정권시절

교육학을 흔들림 없이

강의했던 선생님.

그 여여함이 불교공부에서

왔다는 것을 압니다.

불자로서 지식인으로서 선생님의

모습을 감히 뒤따르고 싶습니다.

극락왕생하시길 두손 모읍니다.

학위를 받고 운이 좋아 바로 대학에 전임자리가 생겨 부임한 이후에야 불교공부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마음을 낸 제게 가산 지관스님이 막 세우신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 입학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교육과정 중에 ‘중론송’ 강의가 있었는데, 아직 학위과정에 있던 열정적인 강사가 어떻게 저렇게 강의할 수 있을까 하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분이 선생님 둘째 아드님이신 김성철 선생인지를 알고 나서 저는 잊고 있던 선생님의 열강을 묘한 감동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선생님과의 인연은 김성철 선생을 매개로 혼례식장이거나 청송학술상 시상식 등에서 잠시 뵙는 것으로밖에 이어지지 못했지만, 청년 시절 한암, 탄허스님과 만나 본격적으로 접하신 불교를 불교학생회 지도교수님이나 참여불교재가연대 대표, 길상선원 지도위원 등을 맡아 몸으로 보여주신 모습 늘 훈훈한 가르침으로 전해 듣곤 했습니다.

특히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길상선원에서 참선을 하시고 돌아오는 길에 친지분들께 식사대접까지 하고 돌아오셔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셨다는 말씀을 듣고는 어느 선사의 입멸과정을 보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선생님 평소 유언에 따라 부의금을 받지 않는다는 손녀의 맑은 눈망울을 마주하면서도 선생님의 삶을 다시 떠올리며 두 손 모았습니다.

우리 시대 재가불자이자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애 자체를 통해 보여주신 선생님의 모습을 우러르면서 감히 뒤따라가고 싶습니다.

스무살 무렵 처음 뵈었던 그 순수한 열정을 죽어가는 순간까지 여여함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공부하고 또 실천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다행히도 둘째 아드님과의 인연을 통해 점검 받으며 조금씩 나아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대에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합니다. 부디 무명의 그림자 온전히 떨치시고 열반의 극락으로 왕생하시기를 빌면서 두손 모읍니다.

제자 박병기 올림

<한국교원대 교수>

[불교신문3025호/2014년7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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