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전파 경로와 수행문화’ 워크숍 현장

맨발로 걸으며 탁발을 하는 남방 불교권의 사원에는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별도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북방 불교권 사원에는 수행을 비롯한 일상적 생활이 사찰 안에서 가능하도록 부엌이나 심지어 공용목욕탕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현대화된 남방 불교권 수행센터의 경우 수 천 명에 이르는 인원이 탁발을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부엌을 갖춘 곳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인적이 드물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수행하는 스리랑카 사원에는 조리시설이 없다. 부처님 가르침은 하나인데 나라마다 수행전통과 문화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왜일까.

한국불교학회(회장 권탄준)와 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원장 윤영해)은 지난 4일 동국대 경주캠퍼스 백주년기념관에서 ‘불교전파 경로와 수행문화’를 주제로 하계워크숍을 개최했다. 남방불교 쪽은 스리랑카와 미얀마의 명상센터에서 10년 이상 수행한 정준영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가, 북방불교는 국내 몇 안 되는 중앙아시아 불교 연구자인 한지연 금강대 HK교수가 발표자로 나섰다.

정준영 교수 … 남방

오직 자신만 들여다보는

구띠ㆍ모래 깔린 경행 공간

상좌부국가들 구족계 주고받기도

정준영 교수는 스리랑카와 미얀마 태국 이 세 국가가 불교의 맥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구족계와 수행문화를 주고받았다고 주장했다. 11세기 무렵 스리랑카 위자야바후왕이 새로운 수도를 만들면서 끊어진 불교를 부활시키기 위해 미얀마에 구족계를 요청했다는 것.

미얀마 바간에 최초 통일국가를 이룩한 아나야타왕은 스리랑카의 요청을 받아들여 비구스님들을 보내 구족계를 전하고 당시 스리랑카에 보존돼 있던 팔리어 삼장도 들여온다.

스리랑카의 명상센터에 가면 고운 모래가 깔린 경행공간이 있다. 사진=정준영 한지연 교수

특히 상좌부 불교 흐름에서 스리랑카 불교의 역할은 막중하다고 강조했다.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최초 국가인 동시에 상좌부 불교를 꽃피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불교국가에서 통용되는 팔리어 삼장을 처음 문자로 기록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석서인 <청정도론> 등 상좌부를 상징하는 대부분의 문헌이 저술된 나라이다.

스리랑카는 섬이라는 지형적 특성 덕분에 경률론 삼장이 원형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반면 육지로 연결된 미얀마나 태국은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유입돼 지속적인 변형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스리랑카 불교는 외세의 침략으로 끊임없는 수모와 단절을 경험해야 했다. 포르투칼,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어지는 400년 이상의 식민통치는 억압의 역사였다. 지금의 수행처는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진행된 불교부흥운동에 의해 설립됐다. 현재 스리랑카 도심에서 스님들이 탁발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러나 산속에 있는 수행처에서는 탁발문화를 원형 그대로 유지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명상센터에는 각자 수행할 수 있는 구띠외에도 고운 모래가 깔린 경행공간이 함께 마련돼 있다. 모래는 수행자들이 자신의 감각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정 교수는 “외세의 불교말살 정책은 승단과 재가사이의 불화를 조장했지만, 그 속에서도 불교를 지키고자 하는 저항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났다”고 역설했다. .

한지연 교수 … 북방

1인1실 개인공간에서

공동체 수행 가능한

대형굴 출현ㆍ신행활동 흔적도

더불어 한지연 교수는 인도 북부의 간다라 지방을 거쳐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이르는 북방불교 수행문화를 소개했다. 대승불교의 발상지인 서북인도는 고온지역이기 때문에 불교가 성행했던 시기의 사원들은 주로 낮은 산자락을 끼고 자리를 잡았다. 서북인도는 현재의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지칭한다.

이 지역은 기존의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적인 모습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사원 탑 기단부에 동전을 쌓은 흔적이 이 시기 사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 교수는 “‘신앙’을 중심으로 한 재가불자들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며 “재가자들의 믿음을 기반으로 한 신행활동이 이뤄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원은 기본적으로 중심부에 탑과 주탑을 둘러싼 소형탑, 공용 목욕탕과 부엌 등을 갖추고 있었다. 내부 수행공간은 대부분 돌을 쌓아 만든 1인1실이어서 처음에는 개인중심의 수행이 이뤄졌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불교가 동전하면서 나타난 석굴사원. 사진=정준영 한지연 교수

이 구조는 중국 당송시대의 선종가람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한 교수는 밝혔다. 개인수행공간은 서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초기 석굴은 서북인도와 마찬가지로 개인 수행공간으로 형성되지만 점차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대형굴도 출현한다.

불교 동전(東傳)의 첫 번째 종착지인 중국 측 관문 하서회랑은 석굴의 보고라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석굴이 존재한다. 사막의 끝자락이어서 극심한 더위와 추위를 피하고 수행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공간은 석굴이 제격이었다.

한 교수는 <양고승전>에 나타난 기록을 근거로 석굴에서 선정수행이 이뤄진 점을 특징으로 제시했다. 서북인도나 서역에서 들어온 스님들이 수행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 수행을 한 것이다.

한 교수는 “우리나라 선문화의 원형이 하서회랑 지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불교신문3025호/2014년7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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