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불교사회연구소.
남무희 교수 ‘신라 왕실과 스님 관계’ 조명

불교가 국교로 추앙받던 신라시대. 스님들은 왕이 부르면 무조건 달려가 도움을 주었을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왕권을 강화하는데 일정 역할을 한 스님이 있다면, 왕의 부름에도 끝까지 응하지 않았던 스님도 있다. 신라시대 스님들은 세간과 출세간법 사이를 적절히 넘나들었다. 남무희 국민대 교수는 불교사회연구소가 지난 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연 호국불교연구 2014년도 1차 학술세미나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남 교수는 “신라 중고왕실은 불교적 왕명을 사용한 불교왕명시대였다. 하지만 왕실과 이 시기 활동했던 스님들이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며 “세부 분석을 통해 특징적인 부분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남 교수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속고승전> 등을 토대로 당시 주요사건을 중심으로 왕과 스님들의 활동상을 조명했다.

남 교수는 왕의 부름을 거절한 대표적인 인물로 자장스님을 들었다. 스님은 신라 26대 진평왕으로부터 재상의 벼슬에 해당하는 자리에 자주 부름을 받았지만 끝까지 거부했다. 스님은 왕이 보낸 칙사에게 ‘하루를 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파계(破戒)하면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왕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화랑출신으로 출가한 혜숙스님이나 혜공스님도 왕권이 강화되는 시대적 흐름에 적극 호응하지 않았다. 반면 세속오계의 가르침은 전한 원광스님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는 걸사표를 쓰는 등 진평왕의 왕권강화에 중요한 부분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자장스님도 진평왕의 뒤를 이은 선덕여왕 때엔 상반된 행보를 보인다. 스님은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중국에서 귀국해 왕이 창건한 절에 주석하며 신라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다. 불교계를 주도하는 위치에서 궁중에 들어가 <섭대승론>을 강의하고 국내 교단조직도 정비했다.

남 교수는 “첫 여성 여왕이 등장하면서 왕권이 미약해지고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을 염려해 태도에 변화를 보였다”며 “자장스님은 진덕여왕 때 옷차림에 대한 제도 개혁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삼국 간 통일전쟁과 나당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에도 일정부분 역할을 한 스님들이 있었다. 남 교수에 따르면 원효스님은 군사 암호를 풀어주는 등 현실문제에 개입했으며 의상스님은 새롭게 성을 쌓으려는 문무왕의 의지를 좌절시키기도 했다.

사진=불교사회연구소.
조경철 박사 “종교와 정치 끊어지기 어렵다”

더불어 이날 발표자로 나선 조경철 연세대 박사는 “세상 모든 것이 국가를 보호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며 “호국유교, 호국도교라는 말이 없어 그렇지 유교와 도교가 국가를 보호하지 않는 종교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조 박사는 “정교분리를 주장하지만 인간사회에 종교가 존재하는 한 종교와 국가,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끊어지기 어렵다”며 “인간이 주체가 되어 발전하는 과정에서 종교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긴 했지만, 인간 파편화에 따른 소외의 증가현상은 다시금 국가에 종교가 맡아야 할 부분이 늘어나는 현상을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호국불교가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국가가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이를 바로잡지 못한 아픈 과거가 있기 때문”이라며 “호국불교란 말이 현재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당분간 ‘반야호국불교’란 용어를 사용해 호국불교 원래 의미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 고대시기) 국가는 불교에 불교는 국가에 서로 내밀면서 국가 발전과 불교 발전을 이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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