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원기 교수 학술회의 발제…배경식 부소장 “변절자와 절교”

그간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던 1930년대 이후 만해 한용운스님의 심우장 시절을 재조명한 학술행사가 열렸다. 심우장(尋牛莊)은 만해스님이 1933년부터 1944년 6월29일 입적 때까지 거주한 곳으로 스님의 사상과 독립의지가 집약된 공간이다.

성북문화원은 지난 6월28일 서울 성북구 동방대학원대학교 강당에서 ‘만해의 심우장 시대’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만해스님은 1940년 일제가 강요했던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등 국내 독립운동과 문화운동이 거의 절멸하다시피 한 ‘암흑기’에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때문에 심우장은 늘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이날 백원기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스님이 암시적인 시 장르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독립정신 고취와 사회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소설을 통해 이를 실천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부분의 소설은 식민지 현실에 대한 발언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를 꺼려했지만 변함없는 실천의지를 소설을 통해 피력했다는 것이다.

1935년 초부터 조선일보에 10개월 간 연재한 첫 장편소설 <흑풍>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정칼럼 <심우당만필>을 썼으며 1940년 8월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할 때까지 <삼국지>도 번역 연재했다.

백 교수는 “일제의 검열이 강화되고 생존의 위협이 심해지자 많은 변절 문인이 생겨났던 상황에서, 비유적인 시 보다 직접적으로 논증하는 소설이 더 나은 수단이었을 것”이라며 “만해에게 소설은 독립과 민족구원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발표자로 나선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은 심우장 시대 만해스님은 변절자들과 절교하고 일제의 협박에도 민족의 지조를 지킨 소수 지사들과만 마음을 열고 교류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인물이 홍명희, 정인보, 안재홍 등이다.

배 부소장은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장편소설 후회를 연재했는데 당시 사장 여운형 과도 교류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밝혔다. 

[불교신문3023호/2014년7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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