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법정에 서다

성낙주 지음 / 불광출판사

주실 돔 지붕 앞에 광창이 있어 동해 아침햇살이 본존불을 비췄다는 광창설, 법당 밑으로 샘물이 흘러 실내의 결로를 방지했다는 샘물 위 축조설 등 20세기 중반부터 지속돼온 석굴암 원형논쟁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한 책이 나와 눈길을 끈다.

20년 넘는 세월을 석굴암 연구에 바친 성낙주 석굴암미학연구소장은 신간 <석굴암, 법정에 서다>를 통해 석굴암 원형논쟁에서 제기된 다양한 학설들을 총망라해 편견과 오류를 지적했다. 1964년 문화재관리국 석굴암 복원공사 50주년을 맞아 출간된 이 책에는 당시 공사를 주도했던 황수영 박사를 추모하는 뜻도 담겨 있다.

20세기 들어 석굴암에선 두 번의 큰 공사가 진행된다. 첫 번째는 일제강점기인 1913년부터 시행된 전면수리공사이고 두 번째는 1964년 7월 문화재관리국의 석굴암 복원공사가 그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석굴암 석실법당을 전면 해체하고 전실과 주실 전체를 시멘트로 덮어버렸다.

당초 전실에 철근콘크리트 옥개를 씌운다는 계획과 달리 보호시설물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후 석굴암은 50년간 지상에 노출된 상태로 있었다.

국보 제24호 석굴암 연구에

20년 세월 바친 재야사학자

일본의 ‘햇살신화’서 파생된

광창설 비롯 개방구조설 등

50년간 제기된 여러 학설들

총망라해서 편견ㆍ오류 지적

그러다 동국대 총장을 지낸 황수영(1922~ 2011)박사가 주도했던 두 번째 공사에서는 전실전각이 설립됐다. 또 총독부가 씌운 콘크리트 위에 2차로 콘크리트 두겁을 씌우고, 불상의 위치를 수정했다.

저자는 황수영 박사가 주도한 두 번째 복원공사를 두고 “본연의 종교성전으로 되살려낸 광정의 대기록”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훗날 이 공사는 석굴암 원형논쟁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1969년 남천우 서울대 교수가 ‘석굴암 원형보존의 위기-결로 파손을 빚게 된 개악보수를 따진다’는 글을 발표한 게 발단이 됐다.

석굴암 원형논쟁을 일으킨 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주실 안에 채광창이 있을 것이라는 광창설이 있다. 남천우 교수의 지론 중 하나인데, 동짓날 동해 일출 지점과 연결돼 주실 돔 지붕 정면에 아침 햇살을 받아들이는 채광창이 뚫려 있었다는 것이다.

동해의 아침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와 본존불 이마의 백호에 반사돼 주변을 밝게 비춘다는 일본인들의 ‘햇살신화’와 맥을 같이 한다. 이와 함께 나오는 얘기가 석굴암이 개방구조라는 것이다. 때문에 햇살이 들어오는 길을 막는 보호각 설치는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태녕 서울대 교수는 샘물 위 축조설도 제기했다. 석굴 뒤편에서 솟는 샘물의 냉기를 이용해 바닥을 식히면 굴 내의 수분이 아래로 가라앉아 이슬이 바닥 표면에만 맺히고 주벽 등에는 맺히지 않는다는 논리다. 원형논리는 석굴암은 석굴사원이 아니라, 옛날 그리스나 로마에서 유행한 대리석 신전과 비슷한 일반 건축물이란 석조신전설로까지 확대됐다.

저자는 이런 학설들에 대해 “대부분은 토함산의 현실을 무시한 환상과 신비주의의 부산물로 학술적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단 토목구조상 주실 돔에 광창을 설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채광창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위치는 높이와 각도를 따져봐도 도저히 부처님 상호에 빛이 비출 수 없다는 것이다.

개방구조설과 관련해서도 일제강점기 복원공사로 보호각이 설치되지 않은 탓에 훼손이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동해의 소금안개에 절고, 잡목에 덮이고, 강우에 씻기고 토사에 묻히고 폭설에 갇히고 영하의 날씨에 얼어 터지는 말 그대로 수난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샘물 위 축조설에 대해서도 “바닥에 이슬이 맺히면 스님과 신도들이 석굴암에서 어떻게 기도를 하겠냐”며 일축했다.

더 나아가 석굴암 원형논쟁의 근간에는 일본의 태양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식민사관의 연장선이라고 피력했다. 그는 광창설과 개방구조설은 동해의 떠오르는 해가 석굴암 본존불을 비춘다는 햇살신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온 학설로 봤다. 저자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는 석굴암을 복원하면서 보호각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 뒤 50년간 석굴암 전실은 노천에 방치됐다. 1912년 전실 야차상(가운데)과 1960년대 초 야차상의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사진제공=불광출판사

석굴암을 찾아온 다수의 일본인들은 토함산 중턱에서, 우리의 동해를 ‘햇살에 반짝이는 일본해’라며 감동을 받았다. 일찍이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석불사 조각에 대하여’에서 토함산 일출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데라우치 총독도 석굴암에서 ‘일본해’를 내려다보며 감회에 젖었다고 한다. 골동수집가 오쿠다 테이는 아침햇살을 본존불 백호와 직결시켰다.

더 나아가 토함산 햇살 이야기는 일제 때 초등교과서에도 실린다. 여기에는 태양숭배신앙을 갖고 있는 일본인의 정서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일본이란 국호부터 ‘태양의 나라’라는 뜻이며 일장기 역시 태양을 붉게 칠한 것이고, 일본불교는 대일여래를 숭배한다.

저자는 “태양신앙이 투영된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달콤한 이야기를 학자들이 그대로 수용한 것”이라고 비판하며 옛 문헌에도 석굴암과 일출을 결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삼았다. 실제로 <삼국유사> <불국사고금창기> <불국사 사적기>를 비롯해 각종 세시풍속관련 기록, 문사들이 쓴 석굴암 기행문이나 시를 봐도 햇살 신화에 대한 구절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석굴암은 달과 더 가깝다는 주장을 했다. 토함산의 옛 이름은 함월산 또는 월함산으로 ‘달을 품어 안은 산’이란 뜻이다. 뿐만 아니라 1960~1970년대 경주에서는 정월대보름이나 한가위면 토함산서 달맞이를 하고 석굴암을 예불하는 풍습도 전해진다.

“지난 50년간 진행된 석굴암 원형논란은 결국 석굴암 연구를 지체시킨 학자들의 헤게모니 싸움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저자는 시종일관 “1300년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석굴암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신화와 환상을 걷어낸 석굴암의 맨얼굴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신문3023호/2014년7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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