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군산에 가는가

심효윤 外 지음 / 글누림

“우리는 과거 해외포교의 역사 속에서 범했던 중대한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아시아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며 참회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과거 해외포교에 종사했던 사람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일본의 해외침략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그것을 정당화했던 종문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인 것이다.” 군산 동국사에 세워진 참사문비의 비문이다.

2011년 일본 조동종 스님들 가운데 이치노헤 쇼코스님(一戶彰晃, 아오모리현 운쇼지 주지)을 대표로 조선침략을 참회하는 의미에서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 ‘동지회’가 만들어졌다. 동지회는 이듬해 과거 식민지 정책이나 전쟁에 가담했던 만행을 참회하고자 동국사 앞마당에 참사문비를 기증했다. 일본이 공식적으로 사과문을 설치하고 행사한 것은 동국사 참사문비 제막식이 처음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는 전국적으로 500여개의 일본사찰과 포교소가 세워졌다. 해방 이후에는 군산 동국사를 제외하고 대부분 철거됐다. 따라서 동국사는 일제강점기 일본불교의 조선침략 유물 중 하나다.

1899년 5월1일 군산항 개항과 함께 개항장의 외국인 전용 주거지역인 조계지가 지금의 영화동과 장미동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그리고 일본승려 우치다 붓칸은 1909년 금강사라는 이름의 일본불교 조동종 사찰로 문을 열었다. 창건 당시 작은 포교소로 시작하여 191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군산 동국사가 명소가 된 것은 고은 시인이 출가한 사찰로 알려지면서다. 효봉스님 문하에서 출가하여 ‘일초’라는 법명을 받기 전 1952년 열아홉되던 해에 고향인 군산의 동국사로 출가하여 ‘중장’이라는 법명을 받고 2년간 동국사서 살았다.

당시 여류시인 정윤봉, 화가 홍건직과 나병재 등으로 구성된 ‘문예단 토요동인회’에 가입한 고 시인은 군산 개복동 비둘기다방에서 토요일마다 예술인 모임을 가졌다.

심효윤 외 6인이 군산을 바라본 시선들을 엮은 책 <왜 우리는 군산에 가는가>는 낯선 근대문화유산의 거리로 비쳐지는 군산을 소통과 생활의 따뜻한 안목으로 재구성했다.

히로츠 가옥과 미곡창고주식회사 사택, 전산가옥 등 오랜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산들의 현재 모습도 만날 수 있다.

[불교신문3023호/2014년7월5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