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림 방장 하안거 결제법어

 

등용문인가? 점액문인가?

등용문인가? 점액문인가?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보자사(報慈寺)의 광운혜각(光雲慧覺)선사는 결제를 앞두고 방부를 들이려는 어떤 납자와 이런 문답을 주고 받았습니다.

“어디에서 왔는가?”?ldquo;와룡(臥龍)에서 왔습니다.”?ldquo;거기서 얼마나 살았는가?”“겨울을 지내고 여름을 지냈습니다.”?ldquo;용문에는 묵어가는 손님이 없거늘 어찌하여 그렇게 오래 머물렀는가?”“사자의 굴 안에는 다른 짐승이 없습니다.”?ldquo;그대가 새로 방부를 들인 것을 감안하여 너에게 삼십방만 날리도록 하겠다.”

송(宋)나라 때 설두중현(雪竇重顯)선사는 이런 게송을 남겼습니다.?鍮?맛?龍門萬)에 증유숙객(曾有宿客)이라?吠俎瓚?進退相將)하니 수조점액(誰遭點額)이랴?鍮?嬖汰?만길 높이에서 일찍이 묵었던 나그네라. 나아가고 물러감에 서로 붙잡아 주니 누가 점액을 만났던가?

잉어가 용문폭포를 통과하면 용이 되지만 통과하지 못하면 올라가던 도중에 바위에 머리가 부딪혀 이마에 멍만 들고 맙니다. 이를 점액(點額)이라고 합니다. 선불장은 뱀을 용으로 만드는 등용문입니다. 선가(禪家)에서 견성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것이 ‘점액’인 것입니다. 결제를 제대로 한다면 등용문이 될 것이요, 결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마에 멍 자국만 남는 점액문이 될 것입니다.

광운선사는 ‘용문에는 묵어가는 객이 없다’고 했습니다.?났關굳榮?‘용문에서 일찍이 묵었던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하안거 결제대중은 용문입구에서 쫓겨나는 객이 될 것이 아니라 용문에 입실하여 묵을 수 있는 객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용문의 객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래 앉아있는 것으로 살림살이를 삼는다면 결국 삼십대의 방망이가 기다리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본인 스스로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결제철에는 반드시 공부를 해 마치겠다는 대용맹심의 각오로써 임해주기를 당부합니다.

鑿斷龍門透碧津

洪流奔驟豈停塵

용문을 뚫고 푸른 하진(河津) 나루를 통과하였으니?貧??거센 물결 위에 어찌 먼지가 앉을 수 있겠는가.

 

“내가 나를 등지지 않는 장부가 되세요”

지금 이 도량에는 용사가 혼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직 일대사를 요달하기 위해서 모여 있겠습니다.

사상산(四相山)이 점고(漸高)하면

삼도해(三途海)가 익심(益深)이라.

옛날에 유생들에게 괄시 받을 때 공부를 훌륭하게 하는 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새 와서는 모두가 대접받는데 몰입되어서 그야말로 제정신을 못 차리는 그런 안타까운 때에 놓여있습니다.

여러분! 귀가 있으시니 듣겠지요.

아무쪼록 이 위기를 놓치지 마세요. 여러분은 일대사를 요달하겠다는 분심을 가지고 이번 하안거 결제에 동참하고 있다고 봅니다.

크나큰 배신은 내가 나를 배신하는 것이 더 큰 배신입니다. 그러기에 거듭거듭 부탁드립니다.

요새 와서는 대접 받으려는데 급급해서 내가 나를 돌아볼 줄 모르는 바로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을 받들겠다는 부처님 제자들이 부처님 말씀은 등지고 내 이익에만 급급한 오늘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이끌어주겠는가?

여러분들 아니고는 아무도 구제할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인천(人天)의 안목을 얻어서 아무쪼록 내가 나를 등지지 않는 장부가 되기를 바라면서 한철 용맹정진 하시길 바랍니다.

 

매화가 눈서리 겪어야 향기가 코를 찌르리라

응연(凝然)한 한 물건이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홀로 가는 하늘과 땅에 달빛만 가득하도다. 파도 없는 바다위에 여룡(驪龍)이 뛰어 놀고 그림자 없는 산위에 사자(獅子)가 노는 도다.

감히 대중에게 묻노니?泳糖떪?개개인이 본래 갖추고 있는?ㅎ?正眼)을 도리어 가히 알겠는가? 만약 안목(眼目)을 갖춘 납승(衲僧)일진댄??한마디 일러보라!

바위돌이 눈을 뜨니 광명이 항사(恒沙) 세계에 비추도다. 알겠는가?

이 낱일은 일찍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요.?摸?자기를 위한 것이니 어찌 가히 등한히 할 수 있겠는가?

위에서 말한 정안은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진면목이니?맘?또한 알지 못했을진댄 혼이 흩어지지 아니한 죽은 사람이니라.

미(迷)한 꿈을 깨닫지 못하면 만사(萬事)가 실(實)답지 못함이니??칼날 위에처럼 다시 정신을 차려서 모름지기 삼요(三要)를 갖추라. 첫째는 대분심(大憤心)이요, 둘째는 대용맹심(大勇猛心)이요, 셋째는 대의정(大疑情)이니?㎱?삼요는 솥의 삼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궐(厥)하면 바로 서지 못함이라.?逾돋?이루고져 하되 삼요를 갖추지 못하면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거와 같음이니 어떻게 근본을 얻으리요.

어찌함인고

대분심이 없으면 방일(放逸)하여 제멋대로 놀 것이요,?맘?대용맹심이 없으면 게으름에 떨어질 것이요.?맘?대의정이 없으면 곧 열 가지 선병(禪病)에 떨어지게 되리니비록 미륵불이 하생할 때 이를지라도 무슨 기특함이 있으리오.

게송으로 이르시되.

逆水撑船筆力量

如猫捕鼠竭精誠

道不遠人人自遠

梅經霜雪鼻充香

역수에 배를 저어 역량을 다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듯 정성을 다하여라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아니하나 사람이 스스로 멀리하니 매화가 눈서리 겪어야 향기가 코를 찌르리라

대중은 진중(珍重)하라!

 

팔풍이 불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나고 늙고, 병이 나고, 죽는다. 피할 수 없다. 왜 늙고 병들고 죽는지 원인을 알면 걱정이 없다. 생사를 피해 도망갈 수는 없다. 그 원인을 혼자는 알기 어려우니,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야 한다. 부처님이나 조사들도 깨닫기 전에는 범부(凡夫)였다. 깨닫기 전에는 고민이나 괴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올바른 길을 찾고 성불했는지 살펴야 한다.

일체 중생은 누구나 본성(本性), 즉 불성(佛性)이 있다. 그런데 망상과 집착에 가리고, 사로 잡혀 불성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의심 하나, 즉 화두를 잡고 지극히 매진하면 그것이 힘을 발휘해 자기를 가리고 있는 사량분별(思量分別), 생각이 없어진다.

결국 생각이 나를 괴롭히고 마음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생각을 쉬면 본래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러기 위해선 첫째 마음을 안정해야 한다. 중생은 욕을 들으면 화가 나고,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가만히 살펴보면 감정에 사로 잡혀있음을 알게 된다. 알고 나면 마음이 동(動)할 필요가 없다. 불문(佛門)에서는 팔풍(八風)이 불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소리를 들어도 흔들리지 않으면, 마음의 안정을 성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육신의 조절도 필요하다. 몸에 나쁜 독약이나 마약을 먹으면 틀림없이 몸은 고장 난다. 음식은 조절하고, 몸은 움직이고 쉬고를 적절히 하는 가운데 마음을 바로 잡아야한다.

마음을 비워야 객(客)이 내 속에 들어오고, 객도 내 속에 들어올 수 있다. 그러면 나를 괴롭히던 모든 장애가 없어진다. 그래야 부처님 같이 성불했다고 하지 않겠나.

※5월13일 오전 10시30분 금정총림 범어사 보제루에서 봉행된 하안거 결제법회 법어를 요약했다.

 

금생뿐이라는 마음으로 정진하라

祖意明明百草頭

春林花發鳥聲幽

朝來雨過山如洗

紅白枝枝露未收

풀끝마다 조사의 뜻 분명함이여!

봄 숲에 핀 꽃 새소리 그윽하네.

아침에 비 뿌린 뒤 산은 씻은 듯하니

가지마다 붉고 희게 드러나 감출 수 없구나.

수행자가 선지식에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으니 “온갖 풀들이 바람에 춤을 춘다”고 합니다. 게다가 “봄 숲에 툭 터지는 꽃과 지저귀는 새들도 그런 이치를 아느냐?” 노래한다고 합니다. 과연 조사가 말하려는 이치가 무엇입니까?

비온 뒤 산은 참으로 청명합니다. 가지마다 핀 꽃도 더욱 선명합니다. 그것이 감출 수 없이 들어난 조사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산은 높이 솟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을 잡니다.

이는 평상의 이치를 통해서 변함없는 도리를 깨우쳐주려 함입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당한 것들을 직시하는 것이 참 수행입니다. 바람이 불면 풀이 춤을 추는 이치와 같습니다. 특별한 이치가 있다고 여기면 십만 팔 천리로 멀어집니다. 진실 그 자리는 원래 모두가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줄 알지 못한데서 어리석음이 생깁니다. 수행은 있는 그대로의 순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그것에 벗어나면 마설(魔說)이 됩니다. 고인이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용사는 자기가 자기를 만나는 것일 뿐 취하려거나 버릴 것도, 긍정하거나 부정할 것도 없다.”

알고 보면 신통과 묘한 작용이 다른 게 없습니다. 물 필요할 때 물 찾고 기름 필요할 때 기름 찾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할 줄 아는 한 물건을 내면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령스러운 주인공을 알지 못하고 육도를 떠돌며 얼마나 나고 죽고 했습니까?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며 밖으로 헤매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사는 끊임없이 나를 핍박해 물러날 곳이 없게 하고 있습니다. 무명의 길 위에서 무생의 도리를 찾아가는 대장부 수행자답게 용맹심을 낼 때입니다. 진흙 속에 있어도 결코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잡다한 세상사에 망설이지 말고 오직 금생뿐이라는 굳은 마음으로 화두와 씨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금생에 이 몸 제도 하지 못한다면

어느 생에 제도 할 수 있으리오.

 

삿된 견해로 이리저리 헤매지 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공부인(工夫人)들이 정진에 앞서 꼭 마음에 새겨야 할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달마혈맥론(達磨血脈論)에서 말씀하신 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이다. 즉 진리에 들어가는 네 가지 중요한 행동이란 것이다.

첫째, 보원행(報怨行)이다.

개성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에게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되서 상호 보완하므로 개체와 전체가 융통하게 하는 것이며,

둘째, 수연행(隨緣行)이다.

비행(非行)을 조심하고 덕행(德行)을 행하여 서로 서로를 받쳐 주는 것이며,

셋째, 무소구행(無所求行)이다.

바라는 것이 없이 자비를 행하여 이타행(利他行)을 하는 것이며,

넷째, 칭법행(稱法行)이다.

불조(佛祖)의 규범을 실천하므로 인격체로서의 삶을 의미한다. 이 네 가지야말로 선(善)의 종합이며 도에 들어가는 초입이다. 도를 닦는 사람이 달마조사께서 말씀하신 사행(四行)을 떠나 달리 도를 닦는다는 것은 그대로 연목구어(緣木求魚)다. 실현 불가능하단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달마스님께서는 또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以指標月 其指所以在月

以言喩道 其言所以在道

顧言而不顧其道 非知道也

昧指而不昧其月 非識月也

所以至人常妙悟於言象之表

而獨得于形骸之外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은 그 손가락의 뜻이 달에 있고, 말로써 도를 표현하는 것은 그 말이 도에 있기 때문이다. 말만을 귀담아 듣고 도를 찾지 않으면 도를 알 수가 없고, 손가락만을 바라보고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극한 도를 아는 사람은 항상 언어 밖에서 묘하게 깨닫고 형상 이전의 도리를 얻게 된다.

무아정적(無我靜寂)속에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정안(正眼)을 얻기 위하여 공부를 지어가되 마음을 태산같이 하여 육근(六根)을 틀어막고 남이 나를 옳다고 하던지 그르다고 하던지 마음에 끄달리지 말고, 다른 사람이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참견하지 말고, 좋은 일을 당하던지 좋지 않은 일을 당하던지 마음을 편안히 하여 무심히 가져서 남이 볼 때 숙맥(菽麥)같이 지내고 바보같이 지내며 벙어리같이 소경같이 귀먹은 사람같이 어린애같이 지내면 마음이 저절로 망상이 없게 될 것이다.

이 공부는 참으로 좋은 것이로되 어려움과 불편함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어떻게 좋은 소식을 기약하겠는가?

觀心一法是何事

迷雲破處月孤明

凡聖從來無二路

莫將邪見隨多道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무슨 일인가

미혹의 구름 없어진 곳에 달만 우뚝 밝기만 하여라.

범부와 성인은 본래로 두 길이 아니거늘

삿된 견해로 이리저리 헤매지 마라.

 

선은 무궁무진의 보물창고

대승일구(大乘一句) 수행자들의 원력과 책임은 무한정으로 텅빈 소리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생활 중에서 알게 모르게 방편시현(方便示顯)을 해야 합니다. 지난시절의 악각악습의 관념적 태도를 변화시키는 작업으로 자기개조를 통한 바탕에서 우리 모두 생활본신(生活本身)의 변화신이 되면 세상을 정토화 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대중을 위하여 일해야 즐겁고, 사랑은 헌신을 하여야 의미가 있으며, 금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 때 가치가 있음을 압니다. 수행자들의 요익중생(饒益衆生)이야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요. 이러한 우리 모두의 삶이 될 때 진정으로 즐겁고 살맛나는 행복으로 통하는 생활이 됩니다.

인생은 차갑고 따뜻하고 달고 쓰며 성취하고 실패하며 많은 기회를 만나거나 잃게 되거나 일터와 놀이터에서, 그리고 배우는 상아탑이나 십자가두에서 고통스런 지옥문에서 뿐만 아니라 억천만사는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소위 선(禪)의 경지는 진실자기 자주·해탈·안정·희열이며, 선은 삶의 즐거움을 촉진하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원천입니다. 선에는 지혜와 보물이 아주 많아 선이 있는 곳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 도수선사(道樹禪師)는 한번은 작은 암자를 지었는데, 그 옆에는 외도수행의 도사가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 도사는 불교 사찰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매일 이상한 요귀들을 만들어 사찰의 스님들과 신도를 괴롭혀 쫓아내려 하였습니다. 천둥번개와 풍마우세로 결국 대중들을 놀라게 하여 내보냈습니다. 요즘 세상사의 일부와 같이 수행풍토와 포교의 어려운 조건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도수선사는 10년이 넘게 거주하며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외도는 마지막까지 온갖 술법을 모두 사용하였지만 도수선사를 내보내지 못했고, 외도는 더 이상 방법이 없어 스스로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뒤 어떤 사람이 도수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외도의 온갖 술수를 어떻게 이겼습니까?” 선사가 대답하기를 “그를 이길 것이 없네. 억지로 말한다면 무자(無字)화두만이 그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이네.” “무자화두가 어떻게 외도를 이길 수 있습니까?” 선사가 말하기를 “있다(有)는 것은 한계가 있고 소멸되어가는 것이며, 헤아릴수(量) 있고 끝이 있다는 뜻이네.

그러나 이 무자(無字)는 한계가 없고 무궁무진하며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묘용(妙用)이란 말이지. 무(無)와 유(有)의 관계는 불변(不變)으로 만변(萬變)을 대응하는 것이니 불변하는 내가 변하는 만변을 이길 수밖에 없던 것이지.” 이처럼 세간의 모든 것에 현혹되지 않고 경쟁하지 않는 수행태도로 살아가면 선하고 부드럽고 여유로운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선(禪)은 무궁무진의 보장(寶藏,보물창고)입니다.

선은 바로 불보살의 가르침인 행으로 들어갑니다. 자신의 안과 밖에서 찾으려면 어긋납니다. 자기 진실행위의 결과인 것입니다. 화두선 그자체가 주인 됨이니 우리의 삶속에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이 나타나는 결과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모든 업식(業識)의 환영(幻影)이 아닌 일체처소와 모든 일 가운데에 화두선행(話頭禪行)의 입장이 되니 팔만세행(八萬細行)에 빛을 발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궁(窮,막힘)과 달(達,통함)에 무애자재하게 할 것입니다.

다시 오지 않을 이번 철에 확실하게 챙기십시오.

[불교신문3009호/2014년5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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