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저술이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역사, 고대문명교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처님 경전을 읽듯 정독해야 할 것이다. 스님께서 이 역사서를 펴냄으로서 사료가 부족한 고대역사에서 큰 광명이 아닐 수 없다.

일부 내용이 신화전설이니 하면서 주목하지 않았던 시기도 있었지만 고고학이나 미술사가들의 연구가 심화되어 갈수록 <삼국유사>의 위치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는 스님께서 역사의 현장을 직접 탐방하며 기록하였고, 지역 노인들을 통해 민간의 이야기들을 채록하며 집필한 책이 <삼국유사>이기에 현장감과 생동감이 어느 역사서와는 다르다.

<삼국유사>에는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기록한 책으로도 유명하다. 가락국기, 금관성파사석탑, 어산불영조에서 불교의 전래에 관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이때가 서기48년이다.

허황후가 서역의 아유타국으로부터 금관국 김수로왕에게로 올 때 모시고 온 탑이 김해에 있는 파사석탑이다. 현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적 위상으로 볼 때 이 파사석탑은 국보 또는 국가보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왕에게 불상과 경문 보내왔음은

왕실이 불교를 인정하지 초전은 아니다

가락국으로 전법된 불교 제대로 인정하면

우리불교는 1700년이 아니라 2000년이라 해야 한다

파사석탑에서, 파(婆)는 바(bh)의 음사로 ‘드러내다’는 뜻이고, 사(裟)는 사(sa)로 ‘진실한 도리’를 의미한다. 즉 파사는 ‘진리가 모습을 드러냄’을 말한다. 허황후가 동국에 부처님의 정법을 옮겨온 위대함이 ‘파사’이고 ‘전등(傳燈)’이니 아주 적절한 이름이라 하겠다.

이를 연유로 하여 가야, 가야산, 장유화상, 칠불암, 쇠 철(鐵), 쇠 금(金, gold) 등 여러 가지 불교전래와 관계된 명칭들이 파생되었다.

고대 바다의 실크로드는 생각보다 활성화되었음이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다. 육지로 오는 실크로드는 중간에 석굴이나 석탑 건축 등 여러 유적들을 남기지만, 바다의 실크로드는 흔적을 남기기가 육지보다 쉽지는 않다.

하지만 육지보다 바다가 훨씬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면 페르시아나 로마의 유리공예품이 신라까지 도착하는데 가장 빠른 시간은 육로의 경우 6개월 해로는 2개월가량 걸린다고 한다.

남쪽으로 유입된 대표적인 식물이 벼인데, 경기도 여주시 흔암리에서는 서기전 6~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탄화미(炭化米)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는 불교가 유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문명의 교류가 활성화 되어 한반도에는 남방식물인 벼가 전래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신라본기에도 남해왕13년(서기16) 7월에 벼멸구로 인한 피해를 기록한 내용으로 보아 이미 벼농사가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언어적으로도 남방언어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대로 녹아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서 ‘지’는 인도와 미얀마에서는 남성형 존칭어이다. 비구니, 할머니, 어머니 등에서 ‘니’는 여성형 접미어이다. 우리나라의 옹기(甕器)는 태국에도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볼 수 있는데 이름이 ‘옹’이다. 뿐만 아니라 1에서 10까지의 발음도 태국어와 우리말이 비슷하다.

<삼국사기>에는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2년(서기372)에 왕에게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고 한 것은 보수적인 왕실 즉 국가에서 불교를 인정함을 뜻하는 것이지 초전은 아니다. 우리는 가락국으로 전법되어진 불교를 제대로 인정해야 하며 우리불교의 역사는 1700년이 아니라 2000년이라고 해야 한다.

모든 불자, 언론, 종단에서는 역사의 위상에 맞게 2000년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표기도 바르게 해줄 것을 바란다.

[불교신문3009호/2014년5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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