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 소설 ‘사람의 맨발’ 출간…“부처님 삶”

한국문학계 대표적인 구도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을 집필한 소설가 한승원이 부처님의 삶을 소설로 한 <사람의 맨발(불광출판사)>을 출간했다. 한 작가는 <사람의 맨발>에서 인류 역사 속에 실존했던 한 인간으로서의 싯다르타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특히 싯다르타가 젊은시절에 왜 출가를 했는가에 착안했다. 작가는 싯다르타를 신격화된 절대적 존재라기 보다, 모든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실존적 고뇌를 거듭한 한 인간으로 생동감있게 형상화했다. 전남 장흥 집필실 ‘해산토굴’을 짓고 한적하게 살아가는 한 작가는 오늘(28일) 오후 서울 인사동 한 찻집에서 불교언론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다음은 기자들과 일문일답.

-불교인연부터.
“어머니로부터 증조모께서 독실한 불자셨다고 들었다. 증조할머니는 100일기도를 해서 우리 할아버지를 낳았을 정도였다.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우리 어머니는 열여덟 열아홉 어린 신부였는데 엄마가 울자, 할아버지는 ‘나는 극락에 갈테니까 울지 말라’고 했다더라. ‘그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열심히 암송하라’고 하셨다고 들었다.

그러면서 어머니께선 내가 태어난 것은 증조할머니의 염원, 그것 때문에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의미를 젊어서는 잘 몰랐다. 갈수록 불교와 인연이 자꾸만 깊어져갔다. 내가 20대였던 1960년대에는 실존주의가 유행이었다. 내 친구 하나가 시를 공부했는데 그 친구가 늘 실존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도 깨달으면 부처다’라는 말을 곧잘 했다. 그 친구가 한 말이 지금도 내 머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멋모르던 그당시 스님들만 보면 스님을 다방 어디로 끌고 가서 따지면서 ‘나도 깨달으면 부처라는 뜻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스님들과 가까워졌다.

대학(서라벌예대)에 들어가서는 나보다 한 살 위인 스님 한 분을 알게 됐다. 도안스님(LA관음사)이다. 서울 돈암동에서 자취했는데 도안스님은 적조암에서 사찰살림을 했다. 나는 반찬만 떨어지면 자취방을 놔두고 적조암에 가서 밥 얻어먹고 열흘이고 한달이고 두달이고 얹혀 살았다. 내가 스님에게 해줄 수 잇는 것은 스님이 잘못쓰는 리포트를 대신 써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님과 같이 잠자고 늘 그랬다. 그 스님이 하시는 말을 따라잡으려고 <반야바라밀다심경 강의>라는 소책자를 공부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불교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철이 들고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쓰기 시작하면서 불교공부를 제대로 하려고 애썼다. 경전도 그 때 많이 읽었다. 스님들도 많이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나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증조할머니의 염원이 지극한 만큼 내가 불제자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장흥에는 큰절이 보림사 외에 천관사라는 절이 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3년동안 농사짓고 천관사에 굽이굽이 올라가서 소설도 쓰고 공부도 하려고 했었다. 거기서 공부했으면 머리 깎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천관사에 찾아갔을 때 늦가을 억새풀이 바람에 날렸다. 억새풀 사각거리던 소리가 지금도 내 정서에 남아있다. 마른 억새풀이 사각거리는 그 소리가 불교적인 정서, 허무라든지 그런 것들과 연관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얼마쯤 소설작품 발표하면서 내가 철이 들었을 때 생각해보니, 내가 쓴 모든 소설들은 부처님의 사상 속에 들어있더라. 내가 기껏 쓴 작품들이 부처님의 말씀 부처님의 삶, 깨달음의 분위기 속에 들어있는 것이더라. 그래서 나는 더욱더 착실한 불제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았다.”

-서울살이 마감하고 늦은 나이 장흥으로 내려갔다.
“내가 50대 중반 들어서서 서울의 삶에서 한계를 느꼈다. 서울에 살아서는 내 삶이 죽도 밥도 안되겠다 싶었. 내 삶을 제대로 살아야겠다 해서 장흥 바닷가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역사인물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선인들을 공부하다보니 그 분들의 삶을 소설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초의’를 쓰고 ‘정약전’을 쓰고 ‘정약용’, ‘추사’를 쓰고…. 그러다 ‘원효’에 이르렀다. 원효를 쓰면서 몇 년간 불교공부에 파묻혀 살았다. 석가모니사상의 바다에 푹 빠졌다. 내가 ‘원효’를 먼저 쓴 춘원 이광수보다 더 좋은 소설을 쓰겠다 도전한 것은 이광수가 원효를 잘못 읽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원효’를 썼다.

나의 최종 목표는 석가모니 삶이었다. 공부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전기들을 탐독했다.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도 읽었다. 박경숙씨가 번역한 인도의 신화 <마하바라따>6권도 완독했다. 인도철학도 함께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한 것이 석가모니에게 접근하는 하나의 준비였다. 최종적으로 역사인물 소설 가운데 마지막으로 써야 할 사람은 석가모니라고 결심했다. 이 책 <사람의 맨발>은 1~2년 동안 쓴 것이 아니다. 평생 불교사상에 푹 젖어들었던 그 모든 세월들이 이 책에 집약ㆍ집적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왜 싯다르타의 삶에 착안했는가.
“소설가가 어떤 한 사람을 소설로 승화시키겠다고 덤벼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시대에 왜 하필 싯다르타 이야기냐 하는 것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내려지지 않으면 쓸 수 없다. 한 남자가 한 여성을 사랑할 때 역시 내 필생의 내 모든 것을 털어부어서 그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이유가 확실하지 않는다면, 그 남자는 바람둥이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 시대에 왜 싯다르타에 주목하는가.

대개의 석가모니 전기를 쓴 사람들은 지금까지 흘러내려온 석가모니의 전기적인 것을 읽고 난 다음의 비슷한 이야기가 전부다. 대개의 전기는 싯다르타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트고 나와서 왕자로서 호위호식하며 살다가 성문 밖에 나가서 늙은이와 죽어가는 사람, 병든 사람을 보고 인생의 허무 느끼고 출가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설적인 신화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내가 석가모니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매우 허망한 이야기, 옳지 않은 이야기다. 석가모니는 왜 출가했는가. 그 이야기를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해주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소설제목이 <사람의 맨발>이다.
“<사람의 맨발> 책표지 역시 맨발 사진이다. 동남아 불교국가나 인도 여행 중 와불을 쉽게 만나는데, 대개 발가락까지 묘사해놓은 불상들이 많다. 이 맨발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출가정신이다. 나는 이 소설을 특히 우리나라의 모든 스님과 불자들이 읽어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이 시대는 자본주의사회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달콤한 마약에 빠져서 산다. 우리는 얼마나 나태해졌는가. 행정편의주의로 해서 ‘괜찮다’, ‘좋다’ 하면서 대충대충 넘어가는 삶이다. 얼마전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다.
초기의 불교를 보자. 그때는 신을 신고 다니지 않고, 맨발로 길에서 태어나서 길을 걸어다니면서 참담한 삶을 살았다. 그럼으로써 참다운 삶을 살게 된다.”

-불자들에게 이 책은 어떤 의미.
“이 시대의 불자들이 너무 호화로운 삶에 젖어 있다. 그런 사람에게 출가정신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싶었다. <사람의 맨발>은 자본주의 사람은 맨발로 땅을 걸어본 경험이 없다. 철군화를 신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철군화를 신고 있기에 아픈 삶을 모른다. 아픈 삶을 이야기해서 깨닫게 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싯다르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문유관은 싯다르타를 읽어보니 아주 아름답게 포장된 이야기일지 모른다. 당시 인도사회는 계급사회다. 그 계급에 들지도 못하는 불가촉천민도 있다. 계급사회를 만들어놓은 것이 사람들인데 그런 구조적인 것이 신의 뜻이라고 포장을 한다. 어떤 죄악을 저질러도 신의 뜻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이번 ‘세월호 참사’도 신의 뜻인가. 싯다르타가 출가를 한 것은 모든 것이 신이 뜻이라고 하는 구조적인 악습을 타파하겠다는 생각으로 출가를 한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는 우리말로 해석하면 ‘하늘 위 하늘 아래 나홀로 우뚝 서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나홀로 우뚝 서있다는 것을 석가모니를 오만한 존재를 생각해선 안된다. 인간이 홀로 절대고독자다 외로운 존재라는 말이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싯다르타는 80세 넘어서 죽음이 멀지 않았을 때 사촌동생 아난이 물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어디에 의지해야 하는가’라고. 석가모니는 ”사람은 모두가 다 하나 하나의 섬이다. 섬에 등불을 밝히고 그 등불에 의지해서 자기의 길을 헤쳐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소설 ‘사람의 맨발’은.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소설로 쓴 화엄경이다. <사람의 맨발>은 싯다르타의 삶이 바로 그런 삶임을 알게 해준다. 자기혼자 수도를 해서 득도를 해서 자기혼자 편안해지는 것은 제대로 득도한 것이 아니다. 득도한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쳐줘서 깨닫게 해주는 실천이 문제다. 석가모니는 실천을 중시했다. 싯다르타의 사상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원효라고 생각하고, 법정스님 만해스님 같은 분들이 가장 잘 실천한 스님들이라고 본다.”

-이제 인물소설은 이것으로 회향했는가.
“인물은 이것이 끝이다. 석가모니의 삶을 5년간 집필했다. 해마다 한번씩 고쳤다. 내가 갖는 시적 감수성 문학적 감수성 서사적 분위기 신화적인 분위기 많이 갖고 있다. 내나이 올해 일흔여섯인데, 나처럼 소설 쓴 사람 별로 없다. 출가해서 득도할 때까지 이야기인데, 결국은 맨발로 산다는 것은 가화(假花)로서가 아닌 생화(生花)로서 산다는 것이다. 맨발로 흙을 밟아보지 않은 사람은 맨발로, 참담한 삶을 살아봐야 한다. 물소가죽 고급 신발을 벗어던지고, 옷과 말을 버리고 누더기 입고 그야말로 맨발이 된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책으로 나온 뒤 다시한번 처음부터 읽었을 때 싯다르타가 호화로운 삶과 이별하는 대목이나 아들 라훌라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대목을 보며 가슴이 울컥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깨닫기 전 이름 싯다르타로만 부르는 이유는.
“초기불교 그 이전의 이야기는 역시 싯다르타의 이야기다. 초기불교보다 더 불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싯다르타의 삶이니까 결국 하나의 불교의 표본이 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독교 사람들이 다락방 교회를 생각하며 살아야지, 성전 짓듯이 하면 되겠느냐고 하듯, 우리 스님들도 지금 철군화신고 있다고 본다. 훌륭한 절 따뜻한 방에서 편히 산다. 맨발을 알아야 한다. 나는 20대 젊은혈기로 살았던 시절에 철없이 멋모르고 살았다. 전라도 사투리로 ‘속아지 없이’ 살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또다시 ‘속아지 없이’ 산다. 다시보니 산은 그저 산이요, 물은 그저 물이라는 순수한 안목으로 돌아가는 이치와 같다.”

한 작가는 “왜 이 시대 싯다르타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누더기 입고 가랑잎 쓰고 참담하게 걷고 건는 고행의 삶으로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고 답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그것은 기독교에서 ‘거듭난다’라고 말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각성’”이라고 했다. 이번 소설 ‘사람의 맨발’은 “한승원이라는 인간의 눈에 비친 허구를 통해 싯다르타의 실체를 나름대로 그린 것”이라고도 했다.

“부처님이 깨닫는 과정까지 밀도있게 썼어요. 깨달은 이후 부처님으로서 종단을 이끌고 열반할 때까지 이야기는 비교적 짧게 구성했습니다. 싯다르타가 청년 청소년시절을 거쳐 출가하고 거기까지 소설의 3분의2이상입니다. ‘나로부터 벗어나서 초월한다는 것’을 출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날마다 이별연습을 합니다. 일흔넷 아내와 하루에 한차례 산책을 하고 여행을 하면서 아내와 그리고 세상과 이별연습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제 머지않아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요. 내가 사용했던 찻잔 하나 우리 정원에 피는 꽃한송이,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 다 소중합니다. 나는 늙어가면서 신화적인 삶에 매혹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부처님의 발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발과 같지만 신화성이 가미되어 있는 발입니다. 한사람의 불자로서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선생님으로 계속 원초시공에 있는 인물, 싯다르타를 어떻게 소설로 쓸 것인가를 놓고 평생 고민했던 소설이다. 기자 여러분도 꼭 책을 일독하고 기사를 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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