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장명 수좌(華藏明首座)에게 주는 글

불에 기름 붓듯 의심 더 맹렬하게

선문답, 그 뜻 헤아리려하면 안돼

 

한 스님이 천황도오(天皇道悟)스님에게 묻기를, “무엇이 계정혜(戒定慧)입니까?” 하자 천황스님이 말하기를, “여기 나에겐 그런 부질없는 살림살이는 없다”고 하였다.

천황도오(748~807)스님은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의 법을 잇고, 형주(荊州) 천황사에 사신 선사다. 25세에 구족계를 받은 후 경산국일(徑山國一) 선사의 회상에서 5년을 살고, 종릉 마조도일(馬祖道一)의 회상에서 2년을 살았다. <전등록>에는 마침내 석두희천 선사를 찾아뵙고 이렇게 물었다고 전한다.

“정혜(定慧)를 여의고서, 어떤 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까?”

“노승에게는 그런 하인이 없는데, 무엇을 여읜단 말인가?”

“어찌해야 현묘한 뜻을 얻겠습니까?”

“그대는 허공을 붙잡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오늘부터 여기를 떠나지 않을까요?”

“그대는 언제 거기서 왔는가?”

“저는 그곳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일찍이 그대가 온 곳을 알고 있다.”

“스님께서는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그대의 몸이 현재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경에는 어떻게 뒷사람들을 가르치십니까?”

“그대는 누구를 뒷사람이라고 하는가?”

천황은 여기서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일을 알고 보면 석두스님에게 묻고 깨달은 기연(機緣)인데, 이것을 천황스님에게 물었다고 원오스님이 착각한 것 같다.

또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 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덕산스님은 “부처는 서천(西天)의 늙은 비구다”라고 하였다.

덕산스님은 용담숭신의 제자다. 촉(蜀)나라 검남(劍南) 사람으로 성은 주(周)씨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율장을 공부하였고 후에는 <금강경>에 능통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주금강’이라고 불렀다. 선사가 덕화를 펼 때 누구라도 와서 물으면 매번 주장자로 쳤으므로, ‘덕산방(德山棒)’이라는 말이 있게 되었다.

덕산스님이 깨달은 기연을 소개한다. 떡 파는 노파에게 한 방 먹은 덕산스님이 아직도 그 기개를 꺾지 않고 용담을 찾아가서 말했다.

“용담(龍潭)의 소문을 들은 지 오래인데, 와서 보니 용도 보이지 않고 못도 없구나.”

이에 용담선사는 “그대는 이미 용담에 왔네”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이윽고 시간이 오래되어 덕산이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주위가 너무 어두워 불을 비춰달라고 청했다. 덕산이 불을 받아들고 신을 신으려고 하는 순간, 용담스님은 틈을 주지 않고 훅 불어 꺼버렸다.

이에 덕산이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천하 노화상들의 혀끝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짊어지고 다니던 <금강경> 소초를 모두 태워버렸다.

덕산이 떠난 후에 용담이 대중에게 말했다.

“어떤 한 사람이 있어 어금니는 칼숲(劍樹) 같고, 입은 핏사발(血盆) 같다. 한 방망이를 때려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니, 훗날 외로운 봉우리에서 나의 도를 세우리라.”

천황스님이나 덕산스님 같은 선사들이 나눈 선문답은 언하에 계합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꽉 막혀야지, 그 뜻을 헤아리려고 하면 못쓴다. 만약 아직 생사일대사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 일을 의심하고 있는 학인이라면, 이런 말을 들으면 불붙은데 기름을 붓듯이 화두의심이 더욱 맹렬하게 들려져서 마치 눈이 온 곳에 서리가 더하는 것처럼 되어야 할 것이다.

이 편지에서 원오스님께서 제자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것도 같은 뜻이다. 기연(機緣)이 닿아 여기서 확 통하든지, 아니면 의단(疑團)을 더욱 뭉치게 해주려는 자비심의 표현인 것이다.

[불교신문3004호/2014년4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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