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장명 수좌(華藏明首座)에게 주는 글

쓸데없이 어리석은 기대하지 말라

이타행하며 공부로 불조은혜 갚아

 

그리하여 몸소 깨달은 바를 자기 역량에 따라 쓰면서 지난 업을 소멸하고 오래도록 익혀온 습성을 녹여야 한다. 이렇게 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반야의 인연을 맺어주고 자기 근본이 익어지도록 연마해야 한다. 비유하면 거친 풀숲을 헤치고 온개 도인, 반개 도인(一個半個)을 얻은 것과 같은 것이니, 그리하여 불법이 있음(有)을 같이 알고 생사를 함께 벗어나야 한다. 미래세가 다하도록 이렇게 하여 부처님과 조사의 깊은 은혜에 보답해야만 한다.

스스로 본분사가 분명해진 다음에는 지난 업을 소멸하고 오랜 세월동안 익힌 습기를 녹이는데 힘써야 한다. 그리고 참다운 수단까지 깊숙이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인연 따라 찾아온 사람에게 반야의 안목을 열어주도록 힘써야 한다.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에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 337~399)은 장안과 낙양을 점령하고 천하통일을 꿈꿨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372년 순도를 시켜 고구려에 불경과 불상을 전했다.

그는 말하기를, “짐은 10만 대군을 일으켜 양양을 치고, 한 개 반개를 얻었다. 도안이 한 개고, 습착지가 반개다”고 하였다. 당대의 고승인 도안은 몸이 온전하여 ‘한 개’라 했고, 습착지는 다리가 불구여서 ‘반 개’라 한 것이다. 이로부터 불법의 귀함을 표현할 때 흔히 ‘한 개 반 개’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그 ‘한 개’인 도안은 왕사가 되어 불교를 크게 일으켰는데, 그의 추천으로 전진왕은 서역 구차국에 있던 구마라집(344~413)을 모셔오기 위해 다시 군대를 일으켰다. 우여곡절 끝에 장안에 들어온 구마라집은 승조 등 300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반야경>, <금강경>, <법화경>, <아미타경> 등을 한역하여 중국 대승불교의 토대를 다졌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승경전들도 대부분 구마라집의 번역이므로, 결국 ‘한 개 반 개’의 작은 인연이 커져서 동아시아에서 대승불교를 부흥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개 반 개’의 최소한의 인연들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오늘날 우리에게 불법이 전해진 감사함과 은혜는 미래세가 다하도록 노력해도 갚을 수 없을 것이다. 원오스님은 이와 같은 속 깊은 뜻을 대중처소를 떠나 수행하고 있는 제자에게 전하면서, 누구에게나 반야 인연을 맺도록 이타행을 하면서 자기 공부하는 것이 불조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설사 인연이 무르익어 부득이 세속에 나와 인연 따라 사람과 하늘 중생들을 제도하더라도 결코 무엇이라도 구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하물며 부귀하고 세력 있는 이들과 결탁하여 세속에 물들고 아부하는 그런 스님들의 행동거지를 본받아 범부와 성인을 속이는 짓을 하랴. 나아가 구차하게 잇속과 명예만을 탐내어 무간업을 지어서야 되겠는가! 설사 깨달을 계기는 없다 해도 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업을 지어 과보를 받는 일은 없으리니, 참으로 번뇌의 세계를 벗어난 아라한(阿羅漢)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물론 천상의 중생까지도 제도할 수 있는 위신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뭔가를 갈구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애써 뭔가를 터득했더라도 그것을 그저 때에 당해서 그렇게 쓸 뿐이지, 뭐라도 조건을 만들거나 결부시켜서 대가를 바래선 안 된다. 법에는 어떤 조건도 붙여선 안 되며 그저 최선을 다해 누구에게나 두루 마음을 살펴 쓸 때, 모든 것이 더불어 함께하며 순조롭게 풀려나가게 되는 것이다.

원오스님은 인연 따라 선원 밖으로 수행하러 나간 제자에게, 중생을 제접할 때 그냥 베풀기만 하지 쓸데없이 어리석은 기대를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모름지기 스님이라면 부처님의 참뜻과 그 뜻을 길이 전하려고 최선을 다한 선지식들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마음을 써야지, 세속의 권력에 결탁하고 아부하는 짓거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업으로 인한 위선까지도 다 떨쳐내고, 진정으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영아행(兒行)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비춰서 이익 되게 할 수 있는 그런 인연을 베풀어야 한다고 경책해 주고 있다. 비록 번뇌가 들끓는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서 중생들과 함께 뒹굴고 있지만 아무쪼록 스스로의 공부를 잘 각찰하여, 처염상정(處染常淨)하는 연꽃같이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 아라한처럼 수행할 것을 원오선사는 제자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불교신문3002호/2014년4월16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