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귀의자성삼신불(歸依自性三身佛)-3

부처님은 선악 양변 부정했는데

수행자는 이 의문 깊이 파고 들어야

너무 빠르고 맑고 미세해 착각

해설 : <단경>에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색신은 집과 같으므로 귀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앞의 세 몸은 자기의 법성(法性) 속에 있고 사람마다 다 가진 것이나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밖으로 삼신부처를 찾고 자기 색신 속의 세 성품의 부처는 보지 못하느니라. 선지식들은 들을 지니, 선지식들에게 말하여 선지식들로 하여금 각기 자기의 색신에 있는 자기의 법성(法性)이 삼신불(三身佛)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하리라.” 

위 구절에서는 ‘청정법신불’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 “이 삼신(三身)의 부처는 자성으로부터 생기나니, 어떤 것을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이라고 하는가?”라면서 “선지식들이여, 세상 사람들 성품은 본래 청정하여 만 가지 법이 다 자기의 성품이 갖추어 있나니, 악한 일을 생각하면 바로 악을 행하게 되고, 착한 일을 생각하면 착한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 가운데 있으며 자성은 항상 청정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법신불’이다. 법신불은 모양과 형상을 떠난 항상 공공적적한 자리다. 그런데 적적한 그 자리에 어떻게 해서 선을 생각하면 선이 이루어지고 악을 생각하면 악이 이루어지는가? 

중국의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순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한 반면 부처님은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 즉 ‘선도 악도 아니다’며 양변을 부정했다. 부처님께서 깨우친 진리인 연기법에 따르면 당연한 이치다. 모든 것은 연생연멸(緣生緣滅), 인연에 의해서 생기고 인연에 의해서 멸한다. 그래서 무생(無生)이라고 한다. 그러면 선도 악도 없어야 하는데 왜 ‘악을 생각하면 악을 행하고, 선을 생각하면 선을 행한다’고 했을까? 수행하면서 바로 이 부분을 깊이 사유하고 고뇌해야한다. 

선도 악도 없지만 ‘공공적적’한 자리에 들어가면 악도 선도 볼 수 있다. 이를 유식(唯識)에서는 8식(識)의 경지라고 한다. 8식의 경지에서 일어나는 일은 너무나도 미세하기 때문에, 미세하다는 말은 분별심, 변화가 빠르다는 말이다. 얼마나 빠른가 하면 시간으로 계산하면 일초를 천육백분의 일로 나눈 것과 같은 짧은 순간이다. 이를 찰라(刹那)라고 한다. 그 짧은 순간에 구백번의 생멸(生滅)이 이뤄진다고 한다. 변화와 분별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공공적적한 무심의 자리에서 체험하고 구경정각을 본 사람이 아니면 이를 잡아내기가 어렵다. 그렇게 구백생멸이 일어나는 것도 부처님의 연생연멸이라고 본다. 그래서 연기법을 잘 봐야 한다. 연기법 외에는 없다. 그것 외에 어떤 철학적 사변을 갖고 오면 그것은 연기법을 벗어난 외도(外道)임을 알아야한다.

그런 연생연멸 속에서 선도 악도 일어나는데 이것이 너무 미세하고 맑고 빠르기 때문에 마치 선과 악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긴다. 이는 영화나 아이들이 정월대보름날 갖고 노는 쥐불놀이와 같다. 영화는 사실 한 컷 한 컷 별도로 찍은 사진을 연결한 것인데 빨리 돌리니까 별도의 장면임을 모르고 연결된 것처럼 본다. 쥐불놀이 역시 깡통을 돌리니까 불이 연결된 것처럼 본다. 이처럼 선과 악이 별도로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도 빠르기 때문에 선이 일어났다가 악이 일어났다가하는 찰라를 잡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신문 2992호/2014년3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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