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기능人 ② 단청장 김현자

조선대 불교학생회 출신 ‘인간문화재’

조선대 미대 80학번 김현자(53). 5ㆍ18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던 1980년, 광주 조선대 미대생이 된 그녀는 암울했던 시절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대학생활을 했다. 통일운동을 하는 법타스님과 당시 호남 청년들의 멘토였던 지선스님이 조선대 불교학생회 지도법사. 앳된 미대생은 두 스님과 인연으로 불교의 진면목에 눈떴고, 대불련 전남지부 임원까지 맡으면서 불자로 다시 태어났다.

광고디자인을 전공한 그녀가 불화를 그리는 단청장이 될 줄이야. 그 당시엔 사찰에서 탱화만 만나도, “무섭다”는 생각 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화, 동양화,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회화를 접했고, 이 가운데 만화부문에선 한때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도야 김현자씨가 지난 3월27일 서울 서대문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서 불화 ‘가사서가도’를 그리고 있다.
<백유경이야기>, <붓다 석가모니>와 같은 불교만화 단행본을 만들었고 무협만화로 유명한 만화가 하승남의 작품배경만 3~4년간 그렸다. 그도 잠시. 회사부도에 건강상 문제까지 겹쳐 일을 모두 그만둬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그녀에게 덮친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준 환한 광명은 부처님 말씀이 담긴 불교경전. 경전을 읽고 기도하면서 무거운 몸과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그녀는 망설임없이 붓을 잡았다.

“평소 잘 아는 스님께서 제가 전생에 탱화를 그렸다고 하셨어요.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온몸이 다 스러져갔는데, 단청을 시작하면서 기운을 차렸죠.” 도야 김현자씨는 2001년 경기무형문화재 제28호 단청장 이수자가 됐다. 김 씨의 단청과 불화는 우선 색감이 남다르다. 그녀가 대학시절 그토록 ‘무섭게’ 느꼈었던 탱화의 이미지는 원색적인 색감이 원인이었던 것. 이에 석채(돌가루)를 활용해서 탱화에 부드러운 색감을 가미함으로써 불화 전체가 풍기는 분위기가 훨씬 편안하고 안정감있다.

또한 대부분 단청ㆍ불화작업이 대작이다보니, 여러사람이 손을 모으는 경우가 많은데 그녀는 중요한 작품일수록 처음부터 끝까지 ‘독야청청 나홀로’ 작업하면서 안정된 톤을 유지한다. ‘도야 김현자’라는 이름이 유명해진 결정적 계기는 지난 2009년 동국대 정각원에 봉안된 ‘통일찰해도(統一刹海圖)’를 통해서다.

대학 때 불교학생회 지도법사였던 정각원장 법타스님이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 로고를 보여주면서 ‘탱화를 한번 구상해보라’고 제안하면서 시작된 작업이다. 김 씨는 우선 경전을 뒤적였다. <화엄경> 39품 중 하나인 ‘화장세계품’(華臧世界品)에서 설명하는 비로자나불의 정토를 눈여겨 봤다.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의 현실에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와 같이 남북이 하나가 되는 염원을 형상화했지요.” ‘통일찰해도’는 바깥쪽부터 안쪽으로 연화장세계를 받치는 풍륜을 그렸고, 대연화장 안에는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에 보이는 산과 백두산 천지도 넣었다. 바탕에는 태극문양이 깔려 있으며 한반도를 수호하는 사천왕까지 상생과 화합을 향한 작가의 간절한 발원이 온갖 상징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오대산 상원사 청풍루 천장화로 모셔진 ‘문수보살 36화현도’(김현자 作).
김 씨는 “호위와 바램, 믿음…. 고대부터 현대인들이 믿는 모든 믿음의 대상을 다 넣어 조성한 조국 평화통일과 불교중흥을 기원한 신중탱화”라고 소개했다. 도야의 또다른 역작 중 하나는 오대산 상원사 청풍루 천장화로 봉안된 ‘문수보살 36화현도’. 상원사 청풍루에 들어설 때 머리 위 천장에서 우리를 반기는 ‘문수보살 탱화’를 친견하면 누구나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절로 환희심이 샘솟으리라.

“신라의 보천태자와 호명왕자가 오대산에 들어와 수행을 했는데, 상원사의 옛이름 진여원에 문수보살이 매일 나타나 36가지의 신통한 변화를 보여줬다는 얘기가 <삼국유사>나 <오대산 사적>에 실려 있어요. 조선 중기 상원사 불전에 모셔졌던 ‘문수보살 36화현도’가 소실되어 현재 전해 내려오는 도상이 없다고 하더군요. 상원사 주지 스님이 36화현의 기록을 참고하여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사방으로 사자좌에 상주하며 설법하는 서른여섯존의 문수보살도를 의뢰하셔서 작업에 착수하게 됐습니다.”

이 작품은 종이가 아닌 삼베에 채색을 입혀 완성됐다. 세로 크기가 6m 넘는 대작이다. 한 사람이 이같은 대작불사를 회향하려면, 혼신을 다 바쳐야 가능한 일. 붓 끝에 초강도의 집중력을 기하고 몸의 기운을 한 곳으로 모으는 고행 끝에야 비로소 탱화는 완성된다. 이천 영원사에 모셔진 ‘영산회상 후불도’를 그릴 때는 전체 탱화의 90%가 다 완성됐지만 막바지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먹은 것을 다 토해내면서 죽기살기로 매달린 끝에 부처님의 상호가 원만하게 나왔다. 한달은 기본, 두달 석달간 죽기살기로 매달려 완성한 탱화를 떠나보내고 나면 어떤 심정일까. “그냥 ‘갔구나’…해요. 허망한 마음이 왜 없겠어요?”

이토록 아프고 힘겹고 허망하기까지 한 단청장의 삶을 그녀는 죽을 때까지 계속하겠다고 했다. 아니 ‘살려고 한다’고 말했다. 작업에 들어가면 경전을 다시 뒤적이고 탱화와 관련된 사찰에 가보고 또 가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탱화를 잘 그리는 법은 하나다. ‘마음을 비우는 것’. “부처님의 진리와 불국정토를 상징한 탱화를 그리면서 어찌 경전을 보지 않고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손 닿는 곳에 붓도 있어야 하지만, 더 가까이에 경전도 있어야 하죠. 불화에도 질서와 공식이 있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그 해답을 어떻게 찾을 수 있나요?”

10여년 전 첫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 자식을 남의 손에 맡기고 오로지 붓질에만 여념이 없었던 그녀는 지금도 서울 서대문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서 몇날며칠 밤샘작업을 하면서 단청과 불화에 빠져 산다. 맑고 선명한 자신만의 탱화를 구축하기 위해 값비싼 재료도 마다않는 그녀는 “돈XX 한다”는 주변사람들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들에겐 “밥은 굶어도 재료욕심은 부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현대인들이 관심있는 눈길로 바라봐주는 불화를 창작해야 합니다. 전통과 문헌을 텍스트로 하되 이를 활용해서 우리 시대 어울리는 예술품을 창조하는 것이 우리 기능인들의 역할 아닙니까. 내 이름 걸고 그린 불화가 100년은 가야지요. 하하하.” 김 씨는 요즘 불철주야 고려불화와 고려단청을 연구하는 중이다. 그녀가 2년여 후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도야 김현자의 신(新) 고려불화’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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