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도회 범어사와 협약서 체결 … 생생한 한국불교 자료 ‘평가’

 관조스님
한국불교의 아름다움을 카메라 앵글에 담으며 오직 수행과 정진에 몰두해온 관조(觀照)스님이 남긴 19만7846컷의 유작이 출가본사인 범어사에 기증됐다.

관조스님 문도회(대표 승원스님, 가평 백련사 주지)는 금정총림 범어사 박물관(관장 경선스님)과 ‘관조스님 유작 필름 관리 및 사용에 관한 협약서’를 체결했다.

관조스님 문도회 대표 승원스님은 오늘(4월10일) 오전 9시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수불스님)을 방문해 이 같은 협약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라 ‘사진 촬영을 통한 수행’으로 수많은 작품을 남긴 관조스님의 유작들이 범어사에 기증되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대중들에게 선보일 단초가 마련됐다.

오늘 협약식에는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과 박물관장 경선스님, 관조스님 문도회 대표 승원스님을 비롯해 범어사 소임자와 관조스님 문도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은 “소중한 자료를 기증해 주어 감사드린다”면서 “관조스님의 유작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는데 범어사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범어사에 기증된 관조스님 유작은 19만7846컷으로 방대한 분량이다. 필름 내용은 크게 △사찰 △석조유물 △폐사지 △인물 △행사 △출판 원고 △외국 △이미지 △기타로 분류했다. 특히 관조스님이 젊은 시절부터 촬영한 범어사와 통도사, 금산사, 운문사, 경주 남산 등 데이터가 풍부해 한국불교의 산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작품들이다.

또한 1978년부터 2004년의 각종 다비식 사진 1712컷과 1983년 이후의 수계산림 사진 2464컷은 지금은 물론 후대에 더욱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관조스님 문도회는 1980년 도서출판 보련각에서 발간한 <僧伽(승가) 李觀照寫眞集(이관조사진집)>을 비롯한 사진집 및 출판서적 21권도 범어사 박물관에 기증했다.

관조스님의 유작필름은 범어사 박물관 책임 하에 항온 항습 기능이 되어있는 별도의 수장고에 보관하게 되며, 수장고 입고 후 필름 보존을 위해 10년마다 중성지 파일을 교환한다.

범어사 성보박물관과 관조스님 문도회는 유작의 전시, 출판, 임대 등 필름의 사용 및 보관에 관한 사항을 결정하기 위해 5인으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문도 대표 승원스님을 비롯해 문도회에서 선재스님과 승련스님이, 범어사에서는 주지 스님이 추천하는 1인과 박물관장이 참여한다. 운영위원회 의장은 범어사 박물관장이 당연직이다.

관조스님 문도회는 오는 9월 24일부터 30일 까지 일주일간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 센터 2층에서 총무원 문화부 주최로 ‘관조스님 석불 사진전’을 개최하고, <석불사진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관조스님 문도대표 승원스님은 “지금까지 본사인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과 소임자 스님들, 박물관장 경선스님을 비롯한 직원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면서“앞으로 본사와 협력해 스님의 유작필름이 한국불교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전하는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 관조스님 = 1960년 범어사에서 지효스님을 은사로, 동산스님을 계사로 출가했다. 1965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으며, 1966년 해인사 강원(승가대학)을 졸업하고 강주를 지냈다. 범어사 교무국장과 총무국장을 역임했다. 그 뒤로 일체 소임을 맡지 않으며 오직 수행 정진에 몰두한 관조스님은 2006년 11월 20일 세수 64세, 법랍 47세로 입적했다. 스님의 법구는 평소 뜻에 따라 동국대 일산병원에 기증됐다.

다음은 2006년 11월29일자(2282호) 불교신문 ‘천수천안’에 이진두 논설위원이 쓴 ‘관조스님’이란 제목의 칼럼이다. 관조스님의 진면목을 잘 알 수 있는 글이어서 소개한다.

범어사 관조(觀照)스님이 열반에 들었다. 불교계는 큰 인물을 잃었다. 스님의 명복을 빈다. 스님은 교계내외에 사진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스님이 왜 사진기를 손에 잡고 반평생을 보낸 지에 대해서는 잘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스님은 30여 년 전 해인사 강주를 역임하고 범어사에 머물렀다. 부산에 사는 필자는 스님을 자주 뵐 기회를 가졌다. 1976년 이후 스님은 종단이나 범어사의 그 어떤 직함도 갖지 않았다. 그전에 범어사 총무ㆍ교무국장을 지낸 게 마지막 직함이었다. 그 뒤로부터는 범어사 안심료에 딸린 독채에서 한거(閑居)하며 사진에 몰두했다.

필자가 스님을 뵈올 무렵 1980년대 초반, 스님은 이미 대혜 선사의 〈서장(書狀)〉을 현토ㆍ 번역ㆍ해설한 책을 펴냈고 〈법화경〉과 〈방거사어록〉도 번역해냈다. 어느 날 스님을 뵈었을 때 스님은 생식(生食)을 하면서 율장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필자는 스님이 경ㆍ율 연구를 사진 못지않게 하고 있음을 알았다.

〈금강경〉에 경천(輕賤)에 관한 말씀이 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 독송하여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게 되면 이 사람은 전세(前世)의 죄업으로 마땅히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만 금세 사람들의 경멸과 천대를 받음으로 해서 전세의 죄업이 소멸하여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이 구절이 이해가 되지 않아 스님께 물었다. 스님은 그 구절은 글자만 따라서 피상적으로 해석해서는 원뜻을 전혀 모르게 된다며 일언지하에 명쾌히 일러주셨다. 그 후 성철스님이 해설한 〈돈오입도요문론〉의 ‘경천’에 관한 글을 보고서 관조스님이 바로 일러주신 그 뜻이 성철스님의 해설과 닿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사진작가다. 그러나 그는 여느 사진작가와 다르다. 스님의 작품은 불교의 사료(史料)다. 작품집 〈승가(僧伽)〉 1~2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지금은 보기 힘든 정경이다. 스님의 작품들은 모두가 이렇듯 한국불교 당대의 역사적 기록이자 세계에 한국불교를 알리는 포교자료이다. 선사가 법어를 남기듯 스님은 영상물을 남김으로써 한국불교사에 한 획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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