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호 특집

25년이 지났지만 시인 기형도(1960~ 1989)의 추모열기는 여전히 뜨겁다. 1988년 여름, 죽기 전 마지막 여행지였던 전주 서고사를 찾아갔다.

◇ “눈썹짙고 허우대 큰 귀공자형”

“스님, 오늘 새벽 형도가 갔습니다.” “아이고, 자살입니까?” 1989년 3월7일 아침 중앙일보 모부장의 전화를 받은 전주 서고사 주지 의성스님은 시인 기형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듣자마자 ‘자살이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스물아홉 젊고 건장한 사내가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이 뜬금없지만 의성스님은 왜 그순간 ‘자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걸까. 그로부터 7개월 전, 1988년 8월3일 기형도 시인이 서고사를 찾아왔을 때 어딘가 어둡고 우울했던 첫인상을 스님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서고사 주지 의성스님은 25년 전 절에 찾아왔던 이름모를 사내가 그토록 유명한 시인인줄 몰랐다. 스님은 “견훤이 창건한 고찰 서고사가 한 시인의 필력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고 말했다.

“눈썹이 유난히 짙고 허우대가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귀공자 스타일이었어요. 하지만 함께 공양을 하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봤죠. ‘어쩌면 그렇게 세상고민을 저혼자 다 짊어지고 사느냐’고 말했죠. 기자라서 그런지 사회와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이 상당히 비판적이었고, 특히 당시 언론탄압에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아 안쓰러웠어요.”

기형도 시인은 왜 서고사를 찾아갔나.

당시 <중앙일보> 문화부 5년차 기자였던 기형도 시인은 여름휴가로 대구와 광주 등지를 여행하다 전주 서고사에 들렀다. 서고사에는 중앙일보에 소설 <가까운 골짜기>를 연재한 강석경(‘2013동리문학상’ 수상자) 작가가 머물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이메일로 신문원고를 주고받지 못하고 신문사가 필자를 직접 만나 원고를 받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편은 분실 위험도 많고 작가와 소통이 어려워서 보통 막내 기자가 원고받는 소임을 맡았었다. 기형도 시인은 특히 문학담당 기자로 강 작가와 인연이 있는데다 소설원고도 받을겸 겸사겸사 서고사를 갔던 것 같다.

<중앙일보> 문화부 데스크를 맡았던 정모씨에 따르면 우울하고 우수에 차 보였던 기형도에게 농담삼아 여자친구라도 사귀어보라고 권했더니 기형도가 “강석경 같은 여성이 이상적인 여성상”이라고 흘리듯 말했다. 9살 연상의 여류소설가를 정말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과 함께 만난 서고사 주지 의성스님은 “문학을 하는 동지애로 대화가 통했고, 기형도가 강석경을 정신적 멘토로 여긴 것 같다”고 전했다.

서고사에 머문 강석경 작가

〈중앙일보〉 연재소설 집필

원고 받으러 절에 온 기형도

밤늦도록 종교 주제 토론

서고사서 처음 만난 의성스님

“근심없고 매력적인 분” 묘사

그 해 겨울 조계사서 공양

죽었다는 비보에 ‘자살 의심’

서고사 하룻밤이 남긴 것

“난 얼마나 작은 그릇인가…

얼마나 生의 방기 즐겼나…

서고사 일박 통해 깨달았다”

서고사 가는 과정은 그가 여행을 마치고 습작노트에 메모형태로 적어놓은 글 <짧은 여행의 기록>에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전주에는 6시에 내렸다. 수박 한덩어리와 복숭아, 그리고 담배 몇 갑을 사고 황방산 서고사를 향해 택시를 탔다. 택시로 20분 못가 길모퉁이에서 소매없이 헐렁한 셔츠에 밀짚모자를 쓴 강선생이 튀어나왔고 나도 택시에서 내렸다.’

일기형식으로 써내려간 여행기록은 등장인물에 관해 제법 자세히 소개돼 있다. ‘절로 올라가는 길에 전주대 국문과에 다닌다는 청년 선혜(善慧) 법우를 만나 동행했다. 그도 서고사에 거하고 있다고 한다…절에 도착해서 의성(懿星)스님(30대 초반의 비구니 주지 스님)과 상좌 스님, 그리고 보살님과 절에서 사는 소녀 하욱(夏旭) 등을 만났고, 보살님 아들인 서울서 숭실대 공과대에 다닌다는 청년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서고사의 법당 극락보전 앞쪽 객방에 짐을 푼 기형도는 경내를 서성이다 저녁8시께 스님이 내준 비빔국수를 먹었다. 지금은 없어진 칠성각 옆 허름한 방에서 강석경 작가가 기거했는데, 이 방을 기형도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뒤집혀질 것처럼 종이갑으로 만든 쪽배 같았다’고 표현했다.

늦은 저녁공양을 마치고, 절마당 한복판에 펼쳐놓은 평상 위에서 차를 마시면서 다담을 나누는 시간. 의성스님은 “방들이 협소해서 서너명이 들어앉을 수가 없었다”며 “모깃불 피워놓고 둘러앉아 차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한여름밤 별이 쏟아지는 산사에서 시인과 소설가, 스님과 대학생이 차를 마시는 시간을 기형도는 이렇게 그렸다.

“식사를 마치고 평상 위에 앉아 의성스님 등과 함께 작설차와 솔차를 들고 이런저런 인생살이 이야기를 했다. 스님은 참 매력있는 분이었다. 그는 근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그가 부러워 나는 슬퍼졌다.…밤10시 가까이 지나 스님과 봉숭아 물들이느라고 한껏 들떠있던 하욱도 잠자리에 들고, 나와 강선생, 숭실대학생, 선혜 법우와 넷이서 종교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기형도 시인이 습작노트에 메모해둔 ‘짧은 여행의 기록’이 1999년 <기형도 전집>으로 나왔다. ‘서고사 가는 길’이란 부제로 상세하게 실려 있다.

◇ “근심없는 스님이 부러워 슬펐다”

이 날 밤 서고사 평상에서 나눴던 대화에선 기형도의 정신세계를 짐작할만한 대목이 많다.

“선혜 법우가 동사섭(同事攝)을 말해주었고 가식과 욕망을 없애고 진실을 향해 사는 삶을 이야기했을 때 나는 그것을 행복, 자기구원으로 깊이 인식했고 감동했다. 나는 ‘종교가 공포에서 비롯된 스스로 성자(聖者)되기의 길’임을 조심스럽게 말했고 ‘욕망과 망집이 없는 평정된 삶은 어쩌면 불행한 삶일 것’이라고 피력함으로써 의심이 많은 자 특유의 ‘혼란과 쟁투, 근심에의 탐닉을 통한 유한자로서의 생 읽기’의 버릇을 드러내고 말았다.”

스님과 아이는 잠들고 20~30대 젊은이들이 밤새도록 꽃피운 이야기에 위트와 유머가 빠지겠는가. 기형도는 “유성 두 개가 너무도 길게 떨어져 우리 모두 탄성을 질렀지만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비행기의 굉음이 터져나와 모두 크게 웃고 말았다”고 전했다.

서고사에서의 하룻밤은 암울한 시대 젊은 시인이 자신에 깃든 죽음과 상실, 환멸과 혼돈의 기운을 잠시 내려놓고 영혼을 씻어낸 계기이자 기회였다. 기형도는 “난 얼마나 작은 그릇이냐. 막상 그 작은 접시를 벗어났을 때 나는 너무 쉽게 길을 잃는 것”이라고 탄식하면서도, “서고사의 밤은 깊다. 풀벌레 소리 하나만으로 나는 이 밤을 새도록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의성스님과 강 작가, 꼬마 하욱까지 데리고 나가 전주 국일관에서 점심백반을 먹고 아이에게 학용품까지 사주고 떠나는 기형도를 보면서 스님은 “참으로 마음 따뜻한 청년이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서고사에서 이 아이와 찍은 사진을 뽑아서 후일 편지와 함께 서고사에 부쳐왔는가하면, 스님 서울 오면 공양 한번 대접하겠다는 지극히 의례적인 약속을 그 해 겨울 기어코 지킨 것도 기형도다.

1988년 12월 서울 조계사 근처 한 음식점에서 함께 한 저녁공양이 기형도와의 두 번째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는 의성스님은, “기형도가 떠나고 25년이나 지났지만 기형도의 넋을 찾아 서고사에 오는 사람들이 여전히 줄을 잇고 있다”며 “시름과 절망에 잠긴 젊은이들이 이 작은 절에 찾아와서 위안을 받을 때마다 ‘글의 위력’을 새삼 실감한다”고 했다.

<짧은 여행의 기록>에서 기형도가 털어놓은 마지막 고백을 보면 ‘절의 위력’도 만만치 않다. “내가 내 생(生)에 얼마나 불성실했던가, 생을 방기했고 그 방기를 즐겼던가를 서고사에서 일박하며 깨달았다.”

■ 시인 기형도는 …

1960년 인천에서 7남매 막내로 태어났다. 교사 출신 부친은 연평도의 유일한 면사무소의 공무원이었다. 아버지가 서해안 간척사업에 손을 댔다가 망하자 경기도 시흥으로 집을 옮겨서 농사를 짓고 안정을 되찾았다. 1969년 뇌졸중으로 부친이 쓰러지고 어머니가 어렵게 생계를 책임졌다.

교과서에도 실린 그 유명한 시 ‘엄마걱정’은 기형도 시인의 원체험에서 생성됐다. ‘열무 삼십 단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신림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기형도는 1979년 연세대 정법대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간 뒤 연세문학회에 가입해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한다. 기형도의 시 ‘대학시절’에는 암울했던 혼돈의 시대를 살았던 대학생의 번뇌가 묻어있다.

우울ㆍ허무의 아이콘

유고시집 27만부 팔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1984년 10월 <중앙일보>에 입사한 기형도는 그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시 ‘안개’가 당선됐다. 1985년 2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수습기자 딱지를 뗀 뒤 조선총독부 자리에 있는 중앙행정관청을 출입하면서 정치부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문화부 기자’를 원했던 기형도는 1986년부터 문화부로 소속이 바뀌었고 이때부터 죽기전까지 3~4년간 물만난 물고기마냥 문학과 예술분야를 훑고 다녔다. ‘포도밭 묘지’ ‘죽은 구름’ ‘빈집’ ‘대학시절’ ‘질투는 나의 힘’ 등 주옥같은 시들이 이 즈음에 지어졌다.

기형도의 시집은 사후에 출판됐다.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며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은 26만5000부가 팔렸고 1999년 10주기를 맞아 발간된 <기형도 전집>은 6만부를 기록했고 지금까지 스테디셀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1989년 3월7일 새벽3시반. 서울 종로3가 파고다극장의 한 좌석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기형도. 사인(死因)은 뇌졸중. 기형도가 죽기 전 마지막 여행으로 들렀던 전주 서고사에 다녀간 뒤 7개월여 흐른 뒤다.

[불교신문3000호/2014년4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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