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전을 가득 메운

수많은 부처님 가운데 한 자리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수행을 마치고 가서

앉을 자리라는 사실을

무언으로 일깨워줘…

큰 절에 가보면 부처님이 한 분이 아니라 수백 또는 수천 분씩 모셔져 있기도 한데 그런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어렸을 적에 해남 대흥사 천불전에서 처음 천 분의 부처님을 친견한 때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압도적이고 뭉클하면서도 무언가 당혹스럽기도 한 복잡한 기분이 들었지요. 그리고 저는 불교를 열심히 공부하면 천 분의 부처님을 모두 알고 기억하게 되겠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지 스무 해가 넘도록 저는 사실 천 분의 부처님 명호를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전에 인도에서 지낼 적에 독특한 힌두교 브라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작은 사원이지만 수백분이 넘는 신상(神像)을 빼곡히 채워놓고 아침마다 기도를 한다는 그는 놀랍게도 수백 명이나 되는 신의 이름과 그 능력, 배경 등등을 다 기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몇 시간씩 그 앞에서 하나하나의 명호를 외고 찬가를 읊으면서 세월을 보내 왔으니까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왜 부처님 명호를 다 기억하지 못하는지를 알 수 있었고 불법이 그네들과 다른 점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불교가 그들과 다른 점은 우리는 신을 숭배하는 죄인에 머물러서 신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부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부처가 되는 것이 삶과 수행의 분명한 목표이겠지요.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그네들의 예배와 겉모양은 비슷하되 그 내용과 정신은 많이 다르고 또 달라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처음에 수많은 부처님의 형상을 조성할 때에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인도의 전통종교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인도의 석굴사원 같은 곳에 가보면 팻말을 보지 않고는 이것이 힌두교 사원인지 불교사원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많을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안에 담긴 다른 정신과 다른 철학을 따라서 뚜벅뚜벅 역사 속을 걸어 나와 지금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세계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불교에서 수 천, 수 만 분의 부처님을 모셔두는 뜻은 모두가 부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천불전을 가득 메운 저 수많은 부처님 가운데 한 자리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수행을 마치고 가서 앉을 자리라는 사실을 말없는 설법을 통해 늘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께 올리는 예배의 최상급은 한없는 발원입니다. 대표적으로 사홍서원이 있겠지요. ‘열심히 갈고 닦아 당신과 같아지겠습니다’ 하는 굳은 다짐이 그분께 올리는 최고의 찬사이자 공양입니다.

그런 불교의 깊은 의미를 알고부터 저는 천불전에 예배를 올릴 때면 더없는 환희와 감동에 젖어들곤 합니다. 그리고 이젠 한분의 부처님 앞에 조아리고 앉아도 수많은 부처님의 모습이 사방을 가득 채운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이렇게 아직 눈 어두운 중생들에게 권세와 능력의 노예가 아닌 큰 지혜와 원력의 주인자리를 내어주시며 자비심으로 손 내밀어 주는 부처님이기에, 우리가 삶의 괴로움에 찌들어 사는 모습이 참모습이 아니라 본래 무한한 자유와 행복의 존재임을 온몸으로 일깨워주시는 부처님이기에, 모든 불자들은 다함없는 발원의 공덕을 모아 거룩하신 부처님께 일심으로 귀의합니다. 나무 서가모니불!

[불교신문2992호/2014년3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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