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카스터교수 ‘실크로드 인문학’에서 “달마대사도 海路이용”

경주시 호텔현대에서의 ‘실크로드 위의 인문학’ 국제인문·문화축제에서 미국의 원로불교학자 루이스 랭카스터 명예교수(UC버클리)가 10월29일 대순환로를 설명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이 여성성으로 바뀐 것은 해상실크로드에 의존한 불교 유입의 근거이며 비구니 교단의 동아시아 전파와 선불교의 전승 역시 불교의 해상 전래 입증의 역사적 근거라는 새 이론이 국제인문축제에서 제기됐다.

경주시 호텔현대에서 개최된 ‘실크로드 위의 인문학’ 국제인문·문화축제에서 미국의 원로불교학자 루이스 R 랭카스터 명예교수(81, UC버클리)는 “혜초스님의 구법 길은 해상실크로드를 따라 가 육로로 돈황으로 돌아왔으며, 한국에 돌아오지 않아 한국에서 해양불교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당시 불교의 많은 새 요소들이 바다를 통해 남중국에 이르고 한국과 일본과 연결된 상인과 항구를 통해 유입됐다”고 10월29일 말했다.

랭카스터 교수는 특히 달마대사의 전승경로도 해상루트라면서 “달마대사는 카슈미르 태생이지만 중국 남단의 광저우(廣州)를 통해 맨 처음 중국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면서 “달마대사가 육로 대신 인도 연안 지역행 배를 이용한 것이 더 수월한 여행길임을 알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랭카스터 교수는 “당시 국제 교역은 불교가 주도해 실크로드에서 비단보다는 향신료가 더 중요하고 ‘해상불교’가 비중이 높다”면서 “동아시아 불교의 두 가지 큰 맥이 광저우행 상선을 타고 전파됐다”고 기존 이론의 확대를 제시했다. 이어 그는 ‘비구니 교단의 중국 도입’과 ‘자비의 관세음보살상의 전래’ 두 사건에 대해서도 “비구니의 서품식에 필요한 10명 비구니 중 1명이 모자랐기 때문에 중국 여승들의 서품식에 필요한 여승을 데려오기 위해 해상 무역상이 스리랑카로 파견됐고 광저우로 돌아와 비구니교단이 항구로부터 시작됐다”면서 “뱃사람들이 관음보살을 바다의 신으로 인식하고 이것이 중국 연안에 전파되면서 관음보살을 여신의 화신으로 내세우면서 관음보살의 성(性)이 바뀌게 됐다”고 말하고, 그 근거로 스리랑카의 강하구에 위치한 바다 항구들에서 바다를 접한 관음보살상들이 발견되고 있음도 밝혔다. 또한 선불교도 항구 근접지역을 통해 유입됐으며, 대승불교의 전래 또한 읽고 쓰기가 발달한 항구가 발달의 기점이고 연안경로가 중요하다고 추가 이론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 UC버클리에서 ‘전자문화지도’(ECAI)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해상불교지도(Atlas of Maritime Buddhism)’ 프로젝트 추진 중임을 밝힌 교수는 “혜초스님 덕분에 신라 시대에 한반도가 바다를 포함한 대순환로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혜초스님이 여행한 ‘대순환로’ 지역은 고대 불교 상인들이 상권을 이루고 사찰들은 재화를 안전하게 한시적으로 보관할 신뢰의 장소”라고 말했다.

불교미술에서 불상의 옷 주름 형식과 얼굴 모습을 지역과 시대에 따라 비교분석한 임영애 교수(경주대, 중앙아시아학회장)는 “실크로드 미술에서 간다라미술이 서에서 동으로 유입된 것만이 아니라 동에서 서로의 유입도 있어 상호교류로 봐야 한다”면서 실크로드의 중앙아시아는 단순 통과지가 아니라 독특한 양식의 생산지라는 새 개념을 말했다. 중앙아시아 불교 미술의 출발점은 간다라라고 전제한 임 교수는 “5세기 북위의 입상에서 재현돼 당을 거쳐 통일신라에서 유행한 중앙아시아 불교 조각은 특유의 비사실적인 옷 주름이 형성되면서 과장된 신체표현과 밀착된 옷 및 독특한 양각주름 등으로 중앙아시아에서 형성된 독특한 조각 특징을 보인다”면서 “두꺼워진 허벅지와 U자형 옷 주름은 감산사 신라 아미타불입장에서도 나타난 중앙아시아 불교 미술의 독특성”이라고 말했다.

이어 임 교수는 벽화의 화려한 채색도 중앙아시아 불교 미술이 생산지라면서 그 원인을 “벽화에서 얼굴에 묵선을 많이 사용하여 강한 인상을 준다거나, 눈동자를 약간 위쪽으로 그려 넣어 마치 눈을 치켜뜨고 있는 모습 역시 중앙아시아의 특징적 얼굴 표현”이라면서 “흙으로 만든 소조상은 재질이 약해 돌출부위가 쉽게 손상돼 돌출을 최소화하며 부족한 입체감을 강한 채색으로 대신했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채색된 얼굴형이 5세기부터 시작돼 7~8세기로 이어진 중앙아시아에서 유행풍이라고 말한 임 교수는 7∼8세기에서는 동아시아 형식이 서쪽으로 영향을 끼치는 상호교류가 실크로드의 특성이라고 설명했다.

기조강연에서 실크로드의 시점을 기원전으로 끌어올린 중국 린메이춘 교수(베이징대)가 10월28일 발표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실크로드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한편 첫날(28일) 기조강연을 한 국제적으로 실크로드학 권위자인 린메이춘(林梅村`58) 베이징대 교수는 발표 후 별도 인터뷰에서 랭카스터 교수의 해상실크로드와 관련, “시기적 문제가 배제됐다”면서 “도자기 종류의 해상실크로드 교역은 확실하지만 한당(漢唐) 시기 육로 실크로드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고 말하고 “해상 실크로드도 운수품·교역품 한 가지로 제한해서 볼 것이 아니라 동서양의 사람들이 교류하는 문화적 원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조강연에서 4개의 사례를 통해 기원전 1세기까지 실크로드 교류를 추적한 그는 실크로드를 통해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해진 것에 대해 “비단이외에도 로마인들의 사치품 비중이 높아 실크로드 개념에 재정의가 필요하다”면서 “한당 시기에 많이 이용되던 육로 실크로드는 경제적 이윤보다는 당시의 사상·생활과 관련한 문화적 교류를 더 많이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관세음보살상의 여성화론와 관련, “키질 벽화에서 수염이 그려진 관세음보살상이 나왔고, 바다의 여신과의 연결은 시기적으로 더 늦다”면서 “해로의 경우 당시 중국 정부의 엄격한 통제 하에 진행돼 승려들의 유입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페르시아산으로 추정되는 ‘신라 유리병’의 존재와 관련 육로와 해로 유입 양측에 대한 다각적 연구 필요성도 말했다.

특히 그는 로마제국의 도시 폼페이가 기원후 79년 화산폭발로 사라지고 남겨진 유적 그림에서 여인이 몸에 두른 천이 실크로드를 통한 중국 비단임을 최초로 확인했다.

또한 “실크로드는 부활이다”라고 표현한 일버 오르타일리 교수(터키 갈라타시라이대학)는 “터키박물관에는 중국 도자기 12000점 일본 도자기 900여점이 소장된 반면 한국 도자기는 전무하다”면서 “실크로드는 12∼13세기 터키의 국부가 증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배기동 교수(한양대 문화인류학)는 “유라시아대륙에서 인구 이동이 많은 루트는 해안을 따른 남방루트일 것”이라며 “이 루트는 위험부담과 장애물이 적어 역사시대에 들어서도 많이 성행하던 것이고 장거리 교역도 활발하게 이용됐다”고 해양루트에 비중을 뒀다. 다만 그는 “지속적 이동은 교통 수단이 다양한 육로가 누적되는 교통량으로서 많고 다양한 육로교통이 방대한 규모가 되는 것”이라며 “실크로드는 동서문화의 상호보완을 하기 위한 필연적인 수단으로 훈족과 몽골의 서양침입사가 서양이 발전하고 청대의 실증주의 번성으로 상호 발전하듯이 다양하며 빠른 차원의 동서교류 산실”이라 말했다.

‘실크로드 위의 인문학,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경주 호텔현대에서 10월28일부터 30일까지 이어지는 국제인문·문화축제는 교육부와 경상북도가 공동주최 한국연구재단(세계인문학포럼)의 주관으로 한·중·일·미국 터키 우즈베키스탄 등의 실크로드 전문가 100여명과 국내 대학 연구자 및 학생 1000여명이 참여했다.

 

 

 

관련자 현지 개별 인터뷰

 

 

루이스 랭카스터 인터뷰(29일)

해양불교를 강조하는 배경은 무엇인가

불교 상인들이 관장하던 항구에서는 불교가 번창했다. 수마트라 자바 등 지 불교는 아주 번청했었다. 이슬람 상인들도 불교를 신봉했는데 아랍인들이 항해하면서도 인도인들이 돈을 벌어 아랍인들이 항구에 사람을 내려 놓게 됏고, 점차 아랍인들이 항구를 지배했지만, 실질적으로 불교는 항구 종교이다. 대다수가 국제 교역에 불교가 편승했다고 생각하는데 인도 사학자들에 의하면 국제교역은 불교에 의해 주도됐었다. 주도자가 불교 상인이고 주요 수출품이 불교였다.

신라 경주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

경주는 해상활동의 중심이다. 항구도 가깝고 실크로드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이며 헤초스님도 여기서 구법여행을 준비하고 시작했다. 중국과 일본으로 가는 경우도 많았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 무역을 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대승불교가 해로를 통해 들어온 것이라면 한국의 조상은 어떻게 이해되나

한국불교의 초기는 북방의 터키어를 하는 돌궐족으로 들어왔다. 이는 조선왕조에 의해 파괴됐다. 혈통을 통해 개념을 바꾸려는 왕조 건립 때문이다. 한국 불교를 이해하려면 터키어를 공부해야 하고, 해로를 통해 들어 온 불교의 대순환로를 봐야 한다.

대승불교가 해양불교라는 이론의 근거는 무엇인가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상인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대승불교는 읽고 쓰는 아이디어로, 글 읽기가 늦었던 인도에서 해양 상인들은 선적 계약서 물품목록 등에 의해 기록을 해야 했고 파피루수 형태로 존재한다. 한국 상인도 읽기 쓰기가 가능했었다.

한국불교는 처음에 북방경로로 들어왔고, 중국 연안을 통해 온 것은 은은한 방식의 전파이며 대표적인 것이 선불교이다. 선불교는 항구를 통해서 한국에 온 것이라고 본다.

 

 

 

린메이춘 교수 인터뷰(28일)

폼페이 그림에서의 중국 실크 확인은 새 학설인가.

예전부터 실크로드 학술에서 로마사 일부분을 차지하는 루트 정도로 다뤘다. 1994년 북경대로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실크로드학 수업을 개설하고 더 집중적 관심을 통해 폼페이 기록을 발굴은 중국내 과련 유물 연구가 광범위해서 조건상 좋았다. 지금껏 실크로드만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 연구한 것이다.

육로와 해양루트의 실크 비중은 어떻게 보나

초기 교역은 대규모 무역이 아니라 식료품의 소규모 거래였다. 물론 실크로의 교역은 로마의 문헌에서 발견되고 로마 일반시민도 실크를 즐겨 입었다. 투명한 중국산 실크는 다른 지역의 두껍고 면량이라는 다른 재질을 쓴 것과 다르다. 중국 마왕토 함류 그림에서 한나라 부인이 투명한 실크를 나타낸 것과 폼페이 기록이 유사하다.

해상실크로드를 중점에 둔 랭카스터 교수의 새 이론을 어떻게 보나

광서지방에서 최근 동한시기의 파란 도자기를 발견했다. 한국에서도 신안해저 침몰선의 경우처럼 도자기의 비중이 해양에서 활발해진 것이고, 전국시대부터 해양교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당 시기에 많이 사용되는 육로 실크로드는 당시 사상 생활과 관련된 문화적 교류를 더 많이 봐야 하고, 동서문화 교류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원명청 시기에 해상실크로드는 많이 활용됐다. 국제적인 대규모의 개념 이전의 실크로드에서는 시기적인 문제들이 있다.

이번 발표에서 기원전 1세기로 실크로드의 시점을 잡은 것인가.

장건이 두 번째로 서역에 갔을 때 실크를 대량으로 유입했다고 해서 그렇게 실크로르만으로 볼 때는 동서 교류는 훨씬 이른 시기이다. 수당 시기 육로를 통한 실크로드의 개념이 점차 확장되면서 원시적 실크로드 원형이 생겼다.

혜초스님과 달마대사가 해로를 이용해 인도로 갔다는 이론을 어떻게 보나.

중국은 바다로의 입출경이 상당히 통제된 체제다. 특히 사람의 유입에는 항구과 육지 모두가 엄격히 통제됐다. 돈황도 서역에서 온 사람을 일정기간 가둬놓은 시설이 있었다. 여기에는 승려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신라의 페르시아산 유리기가 해로와 육로 어느 경로로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나.

육로와 해로 양측다 현재로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중국내 유리기는 신분 계급이 높은 것이고, 신라의 유리기는 왕족과 가까운 높은 계급의 유리기일 가능성이 있으나, 개인 소장과 다량 유입 등의 보다 광범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현장에서

 

두 석학의 실크로드 조우

 

실크로드의 국제적 두 석학이 경주에 하루 차이로 각각 견해를 밝혔다. 루이스 랭카스터 명예교수(미국, UC버클리)의 ‘해양불교(Marrtime Buddhism)’ 부분이 강렬해서 ‘육로실크로드’의 국제적 권위자인 린메이춘 교수(중국, 베이징대) 발표 직후 그를 먼저 인터뷰(28일)했다.

발표 전의 타인 논문에 대한 조심스런 기자의 질문에 린메이친 교수는 꾸밈없이 답했다. 그는 발표문을 사전 검토하지 않았음에도 ‘시기적 문제’와 ‘의문점’ ‘중국의 당시 상황’ 등 고려 요인을 말하고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변도 말했다.

다음날 랭카스터 교수의 발표 직후 그와의 인터뷰(29일)에선 린메이춘 교수의 전날 ‘부동의’ 언급을 질의했다. 랭카스터 교수는 ‘추가 이론’이란 표현 아래 불교 상인들에 의한 항구 불교 번성과 항구 사찰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했다. 특히 그는 “불교는 항구 종교”라면서 “중국·한국·일본 불교의 역사는 항구와 해양지역을 언급치 않고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더구나 중국불교의 대명사인 대승불교와 선불교에 대해 ‘해양불교’임을 강조했다.

전날 인터뷰했던 린메이춘 교수는 “당시 항구에 대한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말해 상호 연결이 쉽지 않았다. 기자는 린메이춘 교수에게 ‘해양불교=달마대사 해로 이용’라는 랭카스터 교수의 사전 발표문에의 견해를 물었고, 답은 ‘달마대사에 대한 많은 기록’ ‘신화적 인물론’ ‘당시 정치사회적 구조’ 등에 “돈황은 서역에서 온 사람들의 일정기간 수용소 시설 지역”이란 팩트로 대응했었다.

두 석학은 접근방법이 달랐다. 린메이춘 교수는 “경제보다는 사상·문화 중시”, 랭카스터 교수는 “경제적 이윤의 무역과 교역”이었다. 로마 금화의 해안 루트를 ‘전자문화지도(ECAI)’로 도형화하는 랭카스터 교수와 고고학적 발굴의 현장과 고문헌학의 결합을 추구하는 중국학자 접근은 ‘시기상의 쟁점’이 관건이 됐다. 랭카스터 교수의 해양불교는 인도사학자와 영국 옥스퍼드대 해양연구(1990년대)가 바탕이고, 린메이춘 교수는 역사학을 정치사상으로 확대하는 접근을 보였다.

첫 선을 보인 국제인문축제에서 고고학 인류학 해양학 복식학 음악·미술 디지털 등이 총망라되면서 학과를 초월한 실크로드 석학이 존재할 이유가 찾아졌다. ‘기록의 탐구’를 넘어 ‘생각의 창조’를 그려낸 인문축제가 대중들의 볼거리로 진입한 길목에 두 석학이 서있었다.

 

 

 

‘실크로드 위의 인문학’ 국제인문·문화축제에서 국내외 관계자들이 개막을 10월28일 축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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