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사람이 아닌 법 위한 승가로 거듭나야
〈31〉사람이 아닌 법 위한 승가로 거듭나야
  • 정운스님
  • 승인 2013.10.0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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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분열은 대승불교 흥기의 빌미로 작용

法에 대한 학문적 천착에서 비롯

小乘폄하가 대승 잉태에선 고무적

최초의 인도 구법 순례자는 법현(法顯, 337~422)이다. 법현 이전에도 인도행 구법승은 많았지만 가는 도중 입적하거나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법현만이 성공적으로 중국으로 돌아왔다. 399년, 법현이 인도로 향했던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당시 중국에 율장이 완비되지 않아 승가의 기강이 해이해지자, 율장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향했던 것이다.

법현보다 200년 후 인물인 현장법사가 인도로 떠날 때는 20대 후반이었다. 법현은 60세로 14년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고령의 나이였다. <법현전>에 의하면 당시 스님이 ‘인도로 가는 길녘, 죽은 자의 해골을 이정표로 삼았다’고 할 정도로 험난한 여정이었다. 법현 이후 현장, 신라의 혜초(慧超, 704~787) 등 수많은 구법승들의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는 정신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들은 진리의 윤택함을 누리고 있다.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는 ‘부처님 재세’ 자체가 법이요, 계율이었는데 부처님이 열반하자, 가섭을 상수로 법과 율을 정립하기 위해 1차 결집이 있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 베살리 지역 스님들의 지계정신이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계율에 물건을 소유할 수 없는데, 일부 승려들이 여분의 소금을 가지고 있다든가 12시 정오를 지나 공양을 하는 것, 금전 소유, 더운 날씨에 저절로 발효된 음료를 마시는 것 등 현 북방불교 입장에서 보면 사소한 문제로 당시 승가는 발칵 뒤집혔다. 이에 서북지방에서 온 야사 장로를 중심으로 700여명의 승려가 8개월 동안 계율을 정리하였다. 계율을 바로 잡으려는 장로(상좌부)파에 반기를 든 일부 승려들(대중부)이 있어, 두 번째 결집을 계기로 승가가 분열(근본분열)되었다. 그러다가 아쇼카 왕 사후에는 승가가 20부파로 분열되어 이 시대를 부파불교라고 한다.

나는 결집에 대해 설명하고자 글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학문적인 견해와 계율 해석 차이로 승단이 나누어지고 서로 분열된 양상을 보였지만, 이 분열은 대승불교가 흥기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당시 승려들이 법(dharma)에 대해 학문적으로 천착함으로서 비록 대승교도에 의해 소승(小乘)이라고 폄하되었지만 대승을 잉태시켰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승려들이 학문에 천착하고, 경전 주석과 계율 해석으로 승가가 분열됨은 불교의 취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자신의 영달(榮達)이 아닌 법과 율을 위한 진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승가는 계파로 갈라지고, 문중이 강조되는 파장이 연출된다는 점에 안타까운 현실이다. 법을 위해 자신도 잊는다는 위법망구(爲法忘軀)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몸담은 계파와 문중 사람들을 위해 진리를 잊는 위인망법(爲人忘法)이라는 점이다.

부처님 열반한지 2500여년이 흘렀어도 붓다의 진리(불보와 법보)는 아름답게 빛나건만 이를 보전하는 승보는 지나치게 퇴색되어있다. 출가 이래 비구니라는 점이 나를 슬프게 한 적은 있지만 오늘 이 원고를 작성하면서 비구니라는 점에 자유로움을 느낀다. 요즘 같은 때, 비구였다면 문중과 계파 속에 얽혀 있어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터이니.

어쨌든 승가의 한 구성원으로서 미래의 한국 승가는 계파를 위한 불교가 아니라 법을 위한 진지한 승단으로 발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마경>에 ‘불국토를 건설코자 한다면, 보살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다스리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 하였다. 승려는 성직자가 아닌 수행자이다. 승려로서 그 어떤 무엇을 하든 수행자 본분만 지킨다면, 그대가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만인의 공양을 받을 것이다.

[불교신문2949호/2013년10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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