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貞觀政要)>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614년 어느 날 태종이 말하길 “내가 전대의 사서를 보니 착함을 표창하고 나쁨을 벌주어 임금을 경계함에 도움을 주고 있소. 무슨 까닭으로 당대(當代)의 국사를 제왕이 보지 못하게 하였소.” 방현령(房玄齡)이 대답하길 “국사에는 선악을 다 기록하여 제왕이 법에 어긋나는 일을 못하게 하길 바랍니다. 임금이 그것을 보고 불쾌하게 여길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길 “짐의 뜻은 고인과 다르오. 지금 국사를 보자고 하는 것은 만약 악한 일이 있으면 고치자는 것이오. 그대가 편찬하여 갖고 오시오.” 방현령 등이 국사를 생략하여 편년체(編年體)로서 고조실록 20권과 태종실록 20권을 올렸다. 태종이 626년 6월4일에 일어났던 당시 진왕(秦王)이었던 본인이 현무문에서 형인 태자 건성(建成)과 아우인 제왕(齊王) 원길(元吉)을 죽인 사건을 보니 숨겨 확실치 않은 문장이 많았다.

이에 방현령에게 말하길 ”옛적에 무왕(武王)이 죽고 그 아들인 성왕(成王)이 어렸기 때문에 주공(周公)이 섭정을 하였는데 주공의 형인 관숙(管叔)과 동생인 채숙(蔡叔)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이 성왕의 명을 받아 형인 관숙을 죽이고 동생인 채숙을 유배시킴으로서 주나라가 편안하였듯이 그때 내가 한 일은 이와 같은 뜻으로서 사직을 편안하게 하고 만인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였소. 사관이 붓을 잡고 번거롭게 사실을 숨기려 하시오. 헛되게 꾸민 말은 깎아내고 그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시오.”

옆에 있던 위징(魏徵)이 말했다. “제왕이 최고의 지위에서 기탄이 없으나 오직 국사가 권선징악하는 것인데 만약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후대 사람이 무었을 보겠습니까. 지금 페하께서 사신(史臣)에게 그 문사(文辭)를 바르게 하시니 정말 공정(公正)의 도리에 합치하는 것으로 천하의 행복입니다.” 일부 정치인들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당태종과 같이 천하대의를 위하여 불륜을 저질렀다고 고백하는 쪽이 훨씬 남자답지 않겠는가.

[불교신문2928호/2013년7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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