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스님의 마음을 맑히는 산사순례 - 고흥 금탑사

 

 

‘스님, 수행의 맛은

어떤 것입니까?’

 

‘수행 자체가

수행의 꽃 입니다’

 

나도 꿈을 꾸어 본다

1년에 보리쌀 한 가마니

금탑사 금당선원에

보시하고 싶다

 

종을 새로 조성할 때는

온 동네방네 사람들에게

다 시주를 받아서

그들의 후손들의 이름을

종에 새겨 줄 일이다

 

연어가 태어난 강으로

다시 돌아오듯이

종에 새겨진 이름을 찾아

돌아오게 할 일이다

교장 선생님께서 1학년부터 4학년까지는 도화 바닷가로 소풍을 가고, 5학년 6학년은 원효스님 천년고찰 금탑사로 소풍을 간다고 훈화를 하셨다. 소풍가는 날 뒷사람 꽁무니 따라 가다보니 산 고개를 넘고 넘어 웬 절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절에 와본 것이다. 이것저것 신기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는 포근했다. 법당 안을 들여다 본 기억은 없다. 다만, 여러 가지 화려한 그림들이 그려진 법당을 돌면서, 너무나 큰 규모에 놀란 눈으로 올려다봤던 기억, 법당 앞 계단에서 도시락을 까먹었던 기억, 뒷간 밑에 똥돼지가 있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절집 담장 너머로 퇴비처럼 쌓인 낙엽들을 헤집고 비자(榧子)를 주어 빈 도시락에 담아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그 뒤 어머니에게 들었다. 거기 범종에 너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40년이 지났다. 이름이 새겨진 그 종이 아직도 그대로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 종에 새겨진 이름도 찾아보고 싶었다.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황벽스님은 ‘비구들아 될 수 있으면, 고향에 가지마라’고 하셨다. 고향에는 아직 가보지 못 했다. 고향 절은 괜찮을 것이라고 위안을 하였다.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절이기도 하거니와 하안거 결제중이기도 해서 조용히 참배만 하고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사찰 경비대장을 견공(犬公)들이 맡는 경우가 더러 있다. 여기도 그랬다. 바로(直)와 해탈이가 짖는 바람에 누군가 절에 들어 왔노라고 보고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비구니 스님이 마당에 나와서는 차를 한잔 하라고 권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차실에 앉게 되었다. 알고 보니 선원 입승 스님이었다. 오늘이 삭발 목욕하는 날이라서 산행 후에 차실에 내려와 차를 한잔 하고 있었단다. 주지스님까지 합류가 되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초등학교 5학년 때 천등산(千燈山)을 넘어 이곳으로 소풍을 왔던 절이라고 실토를 하고 말았다. 여차저차 선원장 스님 방에까지 가게 되었다. 또 차를 마셨다. 스님이 쓰는 찻상은 아주 작다. 다기(茶器)들도 작다. 다관은 참새다관을 좋아하신다. 이유는 겨울에 참새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살아가듯이 수행자들도 소탈하게 살면서 모여 살았으면 하는 뜻으로 참새다구를 쓰신단다.

 

스님은 얘기하는 것을 좋아 하였다. 원래는 말하는 것보다 장갑 끼고 일하는 것을 더 좋아 하였단다. 한번 아프고 난 후에는 생각을 바꾸었다. 누구든지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차를 대접하고 함께 대화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한다. 스님이 이절에 처음 왔을 때에는 법당 말고는 쓸 만한 공간이 없었다. 걸망지고 공부하는 사람은 살 곳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연 따라 사는 것 또한 공부인의 자세다. 청소부터 시작 하였다. 크게 불사를 일으킬 생각 보다는 공부인이 모여 살았으면 하는 원(願)이 있었다. 눈만 뜨면 일을 했다. 그저 시간 가는 줄을 잊어 버렸다. 스님의 토굴 흙벽에 이런 시가 박혀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나에게 취해 사느라 젊음이 가는 줄도 늙음이 오는 줄 몰랐더라 어허이~~ 여여(如如) 시(詩)를 아는가. 나에게 취해 사느라….” 오직 그것만이 스님이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것마저도 놓아버렸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시(詩) 아님이 없다. 스님은 불사 모연문을 만들지 않았다. 그저 틈나는 대로 기도하고 신도들과 함께 직접 일을 하였다.

새로 지은 절에 가면 정(情)이 느껴지지 않은 이유가 수입목을 써서 그런가 싶어서 가까운 산에 있는 나무를 직접 베어다 썼다. 될 수 있으면 가까운 산이나 군내의 문중 산에 있는 나무, 또는 동네에서 얻어 왔다. 기본적으로는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라야 기후 적응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서로 맞아 떨어져서 그렇게 하였지만, 깊은 뜻은 따로 있었다. 그 문중이나 동네의 후손들에게 자기네 선산 나무 베어다가 금탑사 절 짓는데 보시했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였다. 나무를 사다 쓰는 것 보다 비용이 더 들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끈이 되어 불법과 인연을 맺게 해 주고 싶은 것이 스님의 뜻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가끔 절에 찾아오는 이들이 있단다.

 

또 나처럼 종(鐘)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들이 이름 석 자를 확인 하려고 여기까지 왔을까…. 절집에서는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늘 강조한다. 보시를 했어도 보시했다는 하나의 마음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은 그 공덕이 크다고 가르친다. 그래서인지 절집에 시주하고서도 이름을 밝히거나 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 보통 정서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그런가. 중생의 마음으로는 시주했으니 절에 이름이라도 새겨져 있으면 부처님께서 더 좀 잘 봐주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는 것이 속내이다.

저녁 예불에 참석했다. 비구니 스님들의 청아한 예불소리는 천상의 음악 같다. 입승 스님의 말이 생각난다. ‘스님, 수행의 맛은 어떤 것입니까?’ 웃으면서 진지하게 말씀하신다. ‘수행의 꽃은 수행입니다’. 햐~ 멋있다. 금탑사에는 천연기념물 비자나무 군락지가 있다. 손질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동백나무 숲도 대단하다. 붉은 꽃이 떨어져 바닥에 깔려 있는 모습은 또 다른 꽃이다. 산에 살면 저절로 시인이 되는 것 같다. 선원장 스님이 엊그제 재미 삼아 적어 보았다며 시를 칠판에 적어 놓았다. 자연과 내가 하나 되어 번뇌가 그대로 노래가 된다는 시이다. 수행자들과 이렇게 한 십년 잘 살다가 가는 것이 꿈 아닌 꿈이라 하신다. 나도 꿈을 꾸어 본다. 1년에 보리쌀 한 가마니 금탑사 금당선원에 보시 하고 싶다. 나랑 같이 대중공양 함께 갈 도반들은 미리 손을 들어주시기 바란다. 잘하면 버스 한 대 예약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골 절에 종을 새로 조성할 때에는 온 동네방네 사람들에게 다 시주를 받아서 그들 후손들의 이름을 종에 일일이 새겨 줄 일이다. 그래서 연어가 태어난 강으로 다시 돌아오듯이 종에 새겨진 이름을 찾아 돌아오게 할 일이다. 돌아옴은 돌아감이다. 본래자리로 돌아감이다.

글ㆍ사진=일감스님(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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