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경주 남산 중턱에 있는 한 암자에 등을 달고 점심 공양도 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일급순가봐, 가재가 있어.” “얼른 잡아. 잡아서 라면에 넣어 먹자.”

많은 불보살님들이 계신 불국정토에서 이 무슨 구업을 짓는 소린가 싶어 길 한쪽 계곡을 내려다보니 등산객 둘이 자그마한 물웅덩이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다 태어날 만해서 태어나 한 세상 살고 간다고 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무 곳에나 함부로 태어나는 생명도 없다고 한다. 가재 역시 태어날 만해서 태어났을 것이다. 물이 실낱처럼 흐르는 작은 웅덩이를 삶의 터전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는 것도 안쓰럽거늘 어찌 일시적인 즐거움과 한갓 취미로 저와 다른 생명을 함부로 희생시키려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까웠다.

한 가난한 중생이 석가모니를 찾아가 어찌 된 일인지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남에게 보시(布施)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중생은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남에게 줄 것이 없다고 하자 석가모니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일곱 가지나 있다고 일러주시며 이를 습관화하면 저절로 복이 들어와 크나큰 공덕으로 쌓일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 일곱 가지는 첫 번째가 밝은 얼굴로 인사하는 화안시(和顔施), 두 번째가 부드러운 말로 격려하는 언사시(言辭施), 세 번째가 순한 마음으로 상대하는 심시(心施), 네 번째가 편안하고 따듯한 눈으로 보는 안시(眼施), 다섯 번째가 스스로가 나서서 봉사하는 신시(身施), 여섯 번째가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상좌시(床座施), 일곱 번째가 상대의 마음을 읽고 배려하는 찰시(察施)로서 무릇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뿐 아니라 목숨을 가진 모든 생물을 대할 때나 무생물을 대할 때에도 실천되어야 하지 않을까. 중생이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을 비롯하여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니 비록 미물이긴 해도 가재 역시 중생이 아닌가.

말로서 한 생명을 거들내고 마는 일이 잦은 요즘, 모두가 저만의 욕망에 사로잡혀 남을 배려하지 않아 저질러지는 일이지 싶다. 무재칠시는 말 그대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베풀 수 있는 것들이다. 어느 것이 우선이요 어느 것이 나중이라 순위를 정할 수는 없지만 말로 천 냥의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부드럽고 따뜻한 언사시가 우선 아닐까.

[불교신문2926호/2013년7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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