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봉국사-(상)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중전만 사랑?

성깔 대단한 명성황후 위세에 눌려?

명성왕후 매달릴 곳 오직 불교밖에

조선시대 왕들 중에서 후궁을 두지 않은 인물은 현종과 경종, 순종 등 총 3명이다.

경종은 워낙 병약했던 데다 재위 기간이 4년에 불과했고, 순종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 3년간 허수아비 왕 노릇을 했으니 후궁 둘 정신이 없었을 터이다.

그런데 현종은 비록 34살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재위기간은 15년에 달했다. 왕으로 지낸 15년간 단 한 번도 궁녀들에게 한 눈 팔지 않은 채 오로지 왕비하고만 해로를 한 셈이다.

현종이 후궁을 두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치세기간 동안 천재지변이 너무 많이 일어나서 후궁을 둘 여력이 없었다거나 현종의 몸이 약해서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등의 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설은 왕비의 성깔이 너무 대단해서 후궁을 둘 수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현종의 왕비는 명성왕후 김씨이다. 최근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조선판 막장 시어머니의 포스를 제대로 보여준 대비마마(최선경)가 바로 명성왕후인데, 명성왕후는 정말로 대단한 집안 출신에다가 대단한 성질머리를 지닌 여성이었다.

명성왕후가 죽은 직후에 쓰인 행장에는 왕비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친정식구를 돌보는 데는 법식이 있어 아우들에게 교만하고 방자하지 말라고 훈계하니, 끝내 감히 티끌만큼도 은택을 바라는 자가 없었다. 타고난 성품이 명석하여 한 번이라도 귀와 눈을 거친 일은 종신토록 잊지 아니하였고, 서사(書史)에 통효(通曉)하여 능히 고금의 치란을 알았으며, 견식이 밝고도 넓고 도량이 빼어나니, 16년 동안 안으로 현종의 관대하고 인자하며 공손하고 검소한 교화를 도운 것이 지극하였다.”

서인의 핵심멤버인 광산김씨 집안이었던 명성왕후는 친정 동생들로 하여금 조정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할 정도로 호랑이 같은 누나였고, 후일 남인 출신의 장옥정이 며느리로 들어오자 궁궐에서 쫓아낼 정도로 기세등등한 시어머니였다.

행장에는 남편에게 지극 정성을 다한 마누라로 묘사돼 있지만, 정작 그 남편은 후궁 하나 없이 왕비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던 것이다.

마누라가 너무 예뻐서인지, 너무 무서워서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현종은 호랑이 같은 마누라에게서만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첫째 딸인 명선공주와 둘째 딸 명혜공주가 1673년에 나란히 세상을 떠났다. 명선공주는 14살, 명혜공주는 9살로, 아직 시집도 못 간 채였다.

현종의 슬픔은 실록에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현종은 명혜공주가 죽자 “애통한 나머지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하였고, 넉 달 뒤 명선공주가 죽은 후에는 “연달아 참통한 상(喪)을 만나니 심사가 막히고 혼미하다”고 하였다.

현종의 심정은 상명지통(喪明之痛) 그 자체였다. 상명지통(喪明之痛)은 눈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고통스럽다는 뜻으로, 자식 잃은 부모를 의미하는 고사성어이다. 현종 또한 두 딸의 죽음을 겪으면서 신하들에게 눈앞이 캄캄해져 정사를 돌 볼 수 없다고 토로한 것이다.

현종은 눈앞이 캄캄할 지경인데, 명성왕후의 심정은 어떠했으랴. 14살과 9살의 꽃봉오리 같은 자식들을 줄줄이 잃은 명성왕후가 매달릴 곳은 오직 부처님밖에 없었다.

[불교신문2925호/2013년7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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