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대안문명으로 불교를 말한다.

 

이제 살 길은 내 자리에서

붓다로 사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붓다가 살아야 예수도 산다.

개신교라는 기성종교 틀을 벗고 산 지 꽤 되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고 이젠 개신교하고는 인연이 다 되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 즈음, 내 몸이 답답하고 힘들어 하는 날이 계속되어 자연스럽게 발길이 뜸해졌다. 아마도 어머니 태에서부터 익숙해진 종교가 낡고 썩어 더 이상 그곳은 갈 수 없는 시궁창처럼 되어버렸고, 내 몸 크기가 그보다 더 커져버려 마치 덩치 큰 어른이 어린아이 옷을 입은 채 사람들을 웃기려는 코미디언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나를, 문득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몸에 맞지도 않거니와 누더기 같은 옷을 벗고, 이른바 제도종교(신흥종교를 포함)들을 이집 저집 인연이 되어 오갔다. 어느 곳 어느 종교나 상태는 비슷했다. 내 몸뚱어리 하나 어디에 편히 둘 곳이 없었다. 이 때쯤일 것이다. ‘종교(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구나’ 하고 어렴풋 눈뜨게 된 것이. 사람이 세상을 망하게도 하고 또한 사람이 세상을 살린다는 것도.

요 근래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일이 생겼다. 로마 가톨릭 수도원 가운데 하나인 성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장상(지도자)에 40대 젊은 수도자가 뽑힌 사건이다. 박현동 신임 아빠스(영적 스승)께서 “왜 우리 공동체원들이 이런 무모한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그 겸손하고 재치 넘치는 모습. 알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무모한 결정’이 그와 그 공동체를 살릴 것이다. 그는 영적 지도와 수도원의 총책임을 맡게 된 대수도원장으로서 축복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왜관 수도원이 언제나 새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니, 우리 모두 마음모아 그렇게 되기를 기도해야겠다. 그리고 수도원이 “교회와 세상에 열린 공동체가 될 것”이며 “안으로는 수도승이며 밖으로는 사도로 살아갈 것”을 다짐한 그의 말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그에게서는 젊음의 생기와 이 시대의 화두라 할 수 있는 참여와 영성의 조화를 이룰 성숙한 안목을 지닌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좋다.

생각하면 빙그레 웃음 짓게 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붓다로 살자’는 결사체가 그 첫발을 내딛었다는 소식이다. 수행과 실천을 통해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서원을 세운 불자들을 만난 지 오래인데 출재가자가 함께하는 사부대중 모임 그리고 자발적 결사체라니! 기쁨은 말할 것 없고 이제 제대로 부처님의 뜻이 이 땅에도 이루어지나보다 하는 마음에 설렌다.

실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대안문명으로 불교를 말한다.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여느 종단 못지않게 청빈의 전통은 오간데 없고 교리주의와 종파(문중)주의 등 권력화 되어버린 한국불교를 보면 과연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이제 어찌 할 것인가. 이제 살 길은 내가 시방 서있는 자리에서 붓다로 사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붓다가 살아야 예수도 산다.

지난 20여 년 전 몇몇 목회자들과 ‘예수살기’를 했던 때가 떠오른다. 우리가 그래도 목사인데 예수의 제자로서 그분의 말씀대로 한 번 살아보자며 선생님을 모시고 공동체를 꾸려 몸부림 친 그 시절이 벅차고 절박했다. 끊임없이 예수께 묻고 실천하며 되든 안 되든 해보며 살았다. 너무 멀리 왔다. 진리(法)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았다. 붓다로 살자, 예수로 살자. 우선 한 걸음 내딛었다. 이 모든 일의 첫걸음은 나로부터 혁명이다.

 

[불교신문2925호/2013년7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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